웹소설/[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화

울다미 2026. 4. 28. 19:27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신성제일고등학교 운동장에 환호성이 터졌다.

농구 코트 위에서 벌어지는 시합은 막판에 접어들었고,
코트 주변에 몰린 아이들은 저마다 목이 터져라 응원을 쏟아냈다.

관중석 한쪽, 몇 명의 아이들이 어울려 앉아 있었다.
흰 셔츠를 입은 소년이 그 옆에 서 있었다.

그 소년 곁에는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옅은 아마색 머리칼이 목덜미를 느슨하게 덮고 있었다.

피부는 희었고, 이목구비는 혼혈 특유의 이질적인 선이 짙었다.
사람 시선을 단번에 잡아끄는, 서늘하면서도 화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웃는 낯 아래에는 어딘가 비뚤어진 기색이 어려 있었다.
성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거리낌 없이 소년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다 녹았잖아.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초콜릿 코팅이 무너진 아이스크림이 하얀 셔츠를 타고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린 셔츠.
소년은 옆얼굴만으로도 만화에서 빠져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다.

눈을 내리깔자 짙고 긴 속눈썹이 눈꺼풀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그는 조용히,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서 있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고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이게 뭐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 성하진이 심부름 시켜서 사 오라고 했더니 이게 뭐냐고. 예의가 있어, 없어?"
아이들이 한 마디씩 얹는 사이, 방금까지 거들먹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던졌던 성하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어지러웠다.
눈앞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인 순간.

눈을 다시 떴을 때, 성하진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온몸에 아이스크림을 뒤집어쓴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소년.

성하진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공간 관리국의 신참 직원으로서, 자신의 첫 번째 임무가 지금 막 시작된 것이다.

임무 세계는 소설 한 편이었다.
제목은 《연예계 만인의 오메가》.

주인공의 이름은 성서우. 그리고 지금 자신이 빙의한 몸은 그 소설 속 악역 조연, 주인공 성서우의 사촌 동생 성하진이었다.
성하진은 혼혈이었다. 외모가 유독 또렷하다는 것 외에는 혼혈 특징이 도드라지지 않는 편이었다.

원래는 어머니 성희수, 아버지 레슬리 노먼과 함께 S국에서 살았다.
하지만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 성희수는 귀국했고, 성하진은 아버지 곁에 남았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의 이혼 뒤에 제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아버지가 그 상대의 아들과 연락하며 '내 아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성하진은 그 아이가 아버지의 혼외자라고 확신했다.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운 후, 성하진은 혼자 귀국했다.

그 혼외자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 하나를 붙잡고.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신성제일고 교내 최고 인기남 고태윤에게 한눈에 반했다.
고태윤 때문에 성하진은 적지 않은 바보짓을 했다.

고태윤이 사촌 형 성서우와 가깝게 지내자, 성하진은 툭하면 성서우를 건드렸다.
그게 오히려 고태윤의 반감을 샀는데도 성하진은 이유를 몰랐다.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되레 도를 넘어갔다.
누군가 가난한 집 아이 차남현을 고태윤과 비교했다는 이유 하나로, 성하진은 차남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동시에 그 혼외자라고 믿었던 상혁을 뒤쫓아 사람을 붙이고, 압박을 가하고, 심지어 납치까지 계획했다.
그러나 결국 성하진의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하늘 아래 거칠 것 없던 성하진은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었다.

그즈음, 성하진에게 그토록 시달렸던 성서우는 연예계에 발을 내딛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고태윤도 외모 하나로 신인 배우 대열에 들어섰다.

성하진에게 짓밟히던 상혁은 S국의 은밀한 거물 가문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차남현은 더 이상 그 시절의 차남현이 아니었다.

지하 격투가 출신의 냉혹한 재력가로, 이 나라 최대 재벌가의 후계자 자리에 올라 있었다.
셋 모두 성서우를 아꼈다. 그리고 셋 모두 성하진을 증오했다.

성서우가 연예계에서 날아오를 때 세 사람은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줬다.
반면 성하진이 얼굴 하나 믿고 발을 들이밀려 할 때마다, 세 사람은 가차없이 짓눌렀다.

버틸 수 없게 된 성하진은 분풀이를 성서우에게 돌렸다.
성서우가 행사장에 나타난 날, 성하진은 공개적으로 욕을 퍼붓고 뺨까지 올렸다.

성서우가 울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보복이 시작됐다.

고태윤이 직접 성하진의 과거 행적을 폭로했고, 성하진은 인터넷 전체에서 뭇매를 맞았다.
상혁은 재력으로 성하진의 활동 경로를 통째로 틀어막았다.

가장 잔인했던 건 차남현이었다.
단순히 업계에서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조차 얻지 못하도록 손을 써뒀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았다.

결국 생존을 위해 성하진은 유흥업소 문을 두드렸다.
그마저도 병을 얻으면서 쫓겨났고, 거리를 배회하는 신세가 됐다.

어느 날 밤, 보행자 거리의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성하진은 대형 스크린에서 고태윤과 성서우의 약혼 소식을 봤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성하진은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가, 정신없이 차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소설 속 결말을 떠올리며 성하진은 눈앞의 소년을 내려다봤다.
온몸에 아이스크림을 뒤집어쓴 채 말없이 고개를 떨군 소년.

차남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 장면이 왜 펼쳐지는지 성하진은 알고 있었다.
차남현이 교내 인기 순위에 갑자기 이름을 올렸고, 누군가 그가 고태윤보다 잘생겼다고 떠들었다.
정작 고태윤은 반응도 없었는데, 원래의 성하진이 먼저 열을 받았다.

차남현은 가난했다. 학교 안팎에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뛰며 돈을 모았다.
한창 빛나야 할 나이에, 그는 바쁘고 초라하고 고단했다.

성격도 어두웠다. 혼자였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피했다.
원래의 성하진 눈에 그런 아이가 고태윤과 비교된다는 게 용납이 안 됐다.

그래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차남현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심부름꾼으로 고용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하나씩 박살내며 선택지를 없애고, 결국 자신 밑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오늘도 그 연장선이었다. 이 뙤약볕 아래, 길 건너편 편의점까지 아이스크림을 사 오게 했다.
그 거리를 걸어서 다녀오면 당연히 녹을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녹았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집어던졌다.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성하진은 엉망이 된 차남현을 바라보다가 속에서 아찔한 공포가 밀려드는 걸 느꼈다.

표면은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원래 소설에서 차남현이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번 아르바이트는 지하 격투였다.

학교에서는 말없는 빈민가 출신이었지만, 격투 현장에서 그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였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가차없는 외로운 맹수.

그리고 원래 이야기에서 차남현은 성하진이 자신에게 한 모든 것을 열 배, 백 배로 돌려줬다.
성하진을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였다.

그 차남현에게 방금 내가 공개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던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피가 저릿해질 지경이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아이 하나가 부추기듯 입을 열었다.
"하진아, 다시 사 오라고 해."

성하진은 등줄기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말없이 서늘한 눈으로 그쪽을 쏘아봤다.

지금 나 죽이려고.
원래의 자신은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남들 눈엔 그저 조용히 묻어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시 태어날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원래 성하진의 행동 하나로 벌써부터 무덤을 파고 있었다.

임무 내용이 떠올랐다. 차남현이 망가지는 걸 막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성하진은 입술을 안으로 꽉 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 소년을 봤다.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평정을 유지한 채 입을 뗐다.

"저기, 안 사도 돼. 그냥 가."
차남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인간이 왜 갑자기.
오늘 이 흐름이라면 주변에 충동질당해서 더 들들 볶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손을 뗐다.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할 일이 있었다.

차남현이 짧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오늘 돈 아직 안 받았는데."

"아, 맞다."
성하진이 정신을 수습하고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차남현을 찾아 들어가니 이전 이체 내역이 줄줄이 보였다.
만 원, 이만 원……

원래 성하진 카드에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성하진은 망설임 없이 오만 원을 보냈다.

휴대폰을 집어넣으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세탁비도 포함해서 보냈어. 조심히…… 가."

차남현은 성하진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집어 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성하진은 관중석 의자에 기대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하진아, 오늘 왜 그냥 놔줘?"

"그러게. 고태윤 형 아직 경기 중인데, 차남현한테 제대로 본때를 보여야 고태윤 형이 너 마음 알아주지 않겠어?"
성하진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씁쓸하게 깨달았다.

원래 성하진이 그 꼴이 된 데에는 이 플라스틱 같은 것들의 공이 작지 않았겠구나.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성하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볼일 있어서. 먼저 갈게."

"어, 고태윤 형 경기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디 가?"

"응원 용품 반납하러."
적당히 둘러댄 뒤 바닥에서 빌려온 응원 도구를 집어 들고,
성하진은 관중석을 서둘러 빠져나와 체육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오는 길에 무심코 코트 위의 시선과 부딪혔다.
운동을 해서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는데도, 이목구비가 땀에 묻히지 않고 라인이 선명했다.

고태윤은 성하진을 보더니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가, 즉시 시선을 거뒀다.
성하진은 입매를 굳힌 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체육관 복도를 걸으며 발 아래 단단한 바닥의 감촉을 느꼈다.
손에 쥔 응원 도구의 질감, 공기 속에 배어든 열기.

이게 전부 진짜라는 게 실감됐다.
사고로 죽었고, 살아남기 위해 시공간 관리국에 들어갔고, 그 대가로 소설 속 세계에 던져졌다.

그것도 악역 조연의 몸으로.
왜 하필 자신이 이 역할로 떨어진 건지, 솔직히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원래의 자신은 어릴 때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였다.
자녀를 잃었던 양부모가 거두어줬는데, 나중에 양어머니가 친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집 안에서 자신은 조금씩 공기가 되어갔다.
학대는 아니었다. 그냥 희미했다.

어릴 때부터 순응하고 눈치 보는 법을 먼저 배웠다. 감사한 마음은 있었다.
그래서 사고도 치지 않고, 조용히 한 발씩 나아가서 대학까지 들어갔다.

입학한 지 채 일 년도 안 돼서, 아르바이트 중에 사고를 당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양부모에게 이제 친아이가 있다는 것.

자신이 없어진다고 해서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된 적도 없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그들이 더 힘들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는데 옆에 있던 기구실 문이 아무 예고 없이 벌컥 열리더니,
성하진은 반응할 틈도 없이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