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일제히 달려들었다.
차남현은 평소에 먼저 손을 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약하지도 않았다.
여럿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씩 고꾸라지는 건 상대 쪽이었다.
흉터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느끼더니 눈빛이 잔인하게 변했다.
아무도 모르게 골목 구석으로 비켜서서 관 모양의 통을 꺼내 세차게 불었다.
가느다란 바늘이 차남현의 등에 꽂혔다.
차남현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이미 움직임은 더 빠르고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남아 있던 이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주사 내용물이 뭔지, 몸을 격하게 쓸수록 빠르게 번졌다.
흉터를 향해 걸어가려는데 눈앞이 흔들렸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몸속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성을 잠식해 들어오는 무언가.
흉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세다더니! 계속 버텨봐. 데려가서 저쪽 변태들한테 넘겨……그 다음에도 그렇게 뻣뻣할 수 있나 보자."
차남현은 그 말을 또렷하게 들었다. 눈에 짙은 살기가 차올랐다.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제멋대로 무너졌다. 흉터의 부하들이 양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경찰 아저씨, 여기예요! 빨리요!"
흉터의 얼굴이 굳었다. 낮게 욕을 뱉더니 부하들을 이끌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
잠시 후, 골목 어귀에서 머리 하나가 조심스럽게 삐져나왔다.
건달들이 다 사라진 게 확인되자, 성하진이 천천히 차남현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기사를 보내고 혼자 걸으려다가, 고객센터가 차남현이 근처에 있고 흑화 수치가 오르고 있다고 알림을 보내왔다.
급하게 달려왔더니 이 상황이었다.
"차남현, 차남현 정신 차려봐."
벽에 기댄 소년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그 순간 차남현이 고개를 홱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 살기 어린 짐승 같은 눈빛.
성하진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임무.
성하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발 다가갔다.
"차남현, 나… 도우러 온 거야. 때리지 마."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휴대폰을 꺼내 차를 불렀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차가 있었다.
성하진은 끙끙대며 차남현을 부축해 골목 어귀까지 끌다시피 나갔다. 택시 뒷좌석에 그를 밀어 넣듯 태웠다.
고객센터 말로는 이상한 약을 맞은 것 같으니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기사님,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기사가 대답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이 밀폐되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차남현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성하진이 불안한 마음에 몸을 기울였다. 차창을 열어주려던 찰나.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평소 차남현의 눈빛은 늘 차갑고 무감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다음 순간, 강한 힘에 등이 당겨지며 차남현이 성하진을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술에 뜨겁고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차남현이 짓씹듯 입술을 깨물었다.
"윽…!"
성하진이 기겁하며 거칠게 몸부림쳤다. 기사가 뒷좌석의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차남현과 성하진이 좌석 위에서 앞으로 크게 쏠렸다.
그 충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차남현이 순간 정신이 든 것처럼 성하진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리고 자신은 즉시 뒤로 물러나 등받이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기사가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학생?"
성하진은 입술을 닦아내며 겁과 당혹감이 뒤섞인 채 서둘러 말했다.
"약… 이상한 약을 맞은 것 같아요, 죄송한데 제발 빨리 병원으로 가주세요."
기사가 욕설을 낮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엑셀을 밟았다.
성하진은 차남현 쪽으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가방을 꽉 껴안은 채 반대쪽 문짝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맞은편에서 차남현은 차 문손잡이가 부서질 듯 꽉 쥐고 있었다.
혀를 깨물어 입안에 피 맛을 내면서 마지막 남은 이성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반대편 구석에 바짝 웅크린 가느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가슴에 달린 명찰에 '성'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
성하진은 차남현을 병원에 데려가 접수를 마치고 검사비를 냈다.
수액을 맞고 차남현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도망치듯 병원을 나섰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까 골목에서 봤던 차남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눈빛만큼은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듯 날카롭게 곤두세우던 그 얼굴. 생각할수록 가슴이 서늘해졌다.
성하진과 어머니 성희수는 낡은 빌라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외조부모님이 생전에 살던 집, 그러니까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자란 곳이었다.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세 채의 집을 남기셨다.
두 채는 큰외삼촌인 성명훈에게 넘어갔고, 이 낡은 빌라만 성희수 몫으로 떨어졌다.
성희수는 귀국 후 줄곧 이 집에서 지냈고, 성하진도 돌아와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사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이 집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너무 낡고 구질구질하다고, 그저 어머니 옆에 있기 위해 참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하진이 보기엔 나쁘지 않은 집이었다.
오래된 건 맞지만 깨끗하고 정돈돼 있었고, 수도도 가스도 다 잘 나왔다. 무엇보다 누군가 기다려주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성희수는 방송작가였다.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이 집에 틀어박혀 원고를 썼다.
성하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탁에는 이미 반찬 세 가지에 국 한 그릇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성희수는 앞치마를 벗으며 다가와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성하진은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성희수의 진짜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저녁을 먹는 동안 성희수는 학교는 어떻냐며 이것저것 물었다.
귀국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는 눈치였다.
이 아이가 그동안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온실 속 화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였다. 성희수는 이 아이가 지금의 소박한 삶에 적응할 수 있을지 내내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때 거친 노크 소리가 났다.
"누구죠?"
성희수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짙은 화장의 중년 여성이었다.
성하진의 외숙모, 주혜숙이었다.
주혜숙은 성희수와 성하진을 보는 순간 눈빛에 노골적인 경멸이 스쳤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싹 바꾸고 활짝 웃으며 성희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아가씨. 이번에 오는 게 부탁이 있어서. 모레 조카 결혼식이 있는데 하고 갈 만한 패물이 없어서 말이야.
어머니 것 중에 하나만 빌려줘. 나가는 자리인데 너무 초라하면 민망하잖아."
말끝에 주혜숙이 앓는 소리를 하며 슬쩍 덧붙였다.
"예전에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내 패물 다 팔았잖아. 지금은 내세울 게 없어서……."
성하진은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주혜숙은 원래의 성하진에게 있어 익숙한 진상이었다.
원작 속에서 성희수 모자가 귀국하자마자 찾아와 돈을 빌리고, 패물을 가져가고, 당연히 돌려주지 않았다.
올 때마다 어르신들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구구절절 읊어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2억이 넘는 예금과 두 채의 아파트는 전부 큰아들인 성명훈 쪽으로 넘어갔다.
성희수에겐 이 낡은 빌라 한 채뿐이었다. 그나마도 두 분이 편찮으실 때 병원비를 전부 성희수가 댔는데, 주혜숙은 그게 제 돈인 양 생색을 내며 굴었다.
주혜숙은 성희수 모자 뒷담화도 서슴지 않았다.
외국인과 눈 맞아 결혼하더니 그 남자가 알고 보니 빈털터리였고, 못 살겠으니까 도망쳐 돌아온 거라는 둥.
성희수가 외국에서 행실이 조신하지 못해 남편한테 내쫓긴 거라는 둥.
성희수는 워낙 남의 말에 초연한 성격이라 그런 쓰레기 같은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도 몰랐다.
원래의 성하진도 고태윤 꽁무니만 쫓아다니느라 외숙모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멍청하게 허영심에 부풀어 주혜숙에게 제 물건을 이것저것 쥐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훗날, 성희수와 남편이 잇따라 사고를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튀어나와 이 집을 가로챈 것도 주혜숙이었다.
빌려간 돈도, 패물도 한 푼도 돌려주지 않은 채로 뻔뻔하게.
성하진은 본래 기가 센 성격이 아니었다.
성서우와 차남현이 원래의 성하진을 짓밟았다면, 그건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주혜숙은 달랐다. 원래의 성하진은 저 탐욕스러운 여자에게 잘못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조카를 길바닥으로 내몰았다.
성희수는 남과 엮이는 걸 피곤해하는 편이라, 주혜숙의 구구절절한 사설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짚으며 패물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성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의 손목을 잡으며, 주혜숙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이번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외숙모. 저번에 빌려가신 진주 목걸이 아직 안 돌려주셨는데요.
그거 먼저 가져오시면, 다른 걸 빌려드릴지 말지 그때 가서 얘기하시죠."
성희수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주혜숙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대놓고 혀를 차며 쏘아붙였다.
"희수야, 너 외국 사람이랑 살다 오더니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니?
나랑 네 오빠가 어르신들 옆에서 똥오줌 받아내며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작 목걸이 하나 쥐고 조카가 숙모한테 이렇게 따지고 들어?"
오래된 빌라는 방음이 형편없었다.
주혜숙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자 복도 쪽에서 수군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주혜숙은 성희수가 남들 눈에 오르내리는 걸 질색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악을 썼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다들 들어보세요! 평생 부모 얼굴 한번 안 비추다가, 돌아가시니까 냉큼 집구석 차지하고 들어와 살고.
자기 오빠랑 올케한테는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사람이 다 있어요!
외국 놈이랑 살다 오더니 우리 같은 핏줄들은 이제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건지!"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이 하나둘 복도에 얼굴을 내밀며 기웃거렸다.
주혜숙은 승리감에 찬 눈빛으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희수야, 예전에 잘나갔다 해도 이제 이혼당하고 쫓겨나 돌아온 처지잖아.
우리가 그래도 진짜 가족이지. 애 아버지가 와서 챙겨줄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한테 쌀쌀맞게 굴면 나중에 피눈물 흘려……"
성희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싸움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대충 아무거나 쥐여줘서 이 입방아를 막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하진은 어머니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주혜숙 같은 거머리는 한 번 피를 내주면 살점까지 뜯어먹으려 든다. 예전에 살던 달동네에서 저런 부류는 넌더리가 나게 봐왔다.
성하진은 일부러 어깨를 움츠리며,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엄마, 우리 지금 당장 생활비도 빠듯하잖아……. 저번에 외숙모가 할머니 병원비 갚으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그 돈은 원래… 원래 엄마가 다 낸 거 아니었어요? 우리가 왜 또 갚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6000만 원을 당장 내놓으라고 협박하시면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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