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 20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3화

한씨 어르신이 침통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차남현의 무릎 위에는 두꺼운 앨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앨범 속에는 세 가족의 단란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기품이 흘러넘치는 사진 속 젊은 알파가 바로 그의 친부였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소름 돋을 만큼 빼닮아 있었다. 사진 속에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오메가가 어린 남현을 안고 그네에 앉아 있었고,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선 남자의 눈빛은 아내와 아들을 향한 지독한 애정으로 뚝뚝 묻어났다. "……그날, 네 부모를 습격한 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돈이 아니었다. 네 부모는 피를 흘리며 쫓기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널 숨겼어. 납치범 놈들도, 그리고 나조차도…… 널 찾지 못하게 말이다." 한씨 어르신의 탁한 눈동자에 붉은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도 알지..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2화

하진은 흠칫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하진이 입을 떼려는 찰나, 곁에 선 상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하진아.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재미로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버릇은 고쳐야지." 하진의 숨이 턱 막혔다. 상혁은 차남현을 자비롭게 내려다보며,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 거침없이 금액을 적어 내밀었다. 여유로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진이가 어릴 때부터 워낙 오냐오냐 자라서 남 배려하는 법을 잘 몰라요. 두 사람 일은 우리 하진이가 잠깐 호기심에 장난 좀 친 거니, 학생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차남현은 수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상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말이야. 사람이 주제 파악과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야 하..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1화

거래를 수락한 다음 날부터, 성하진은 차남현이 사다 준 아침을 입에 대지 않았다. 차남현이 보내는 메시지도 무시했고, 걸려 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직접 만나서 확실하게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차남현의 얼굴을 보고 그 잔인한 말을 내뱉을 상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많은 잘생긴 알파들을 아무렇지 않게 차버렸으면서. 천하의 바람둥이 오메가 성하진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죄책감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라리 번호를 차단해 버릴까. 액정 위로 손가락을 몇 번이나 미끄러뜨렸지만, 그간 차남현과 함께 웃었던 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끝내 차단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차남현은 기어코 학교 정문에서 하진을 막아섰다. "성하진…..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0화

교실에 들어서니 자기 자리에 아침이 놓여 있었다. 옆자리 짝이 복잡한 눈빛으로 성하진을 봤다. "차남현이 가져다줬어. 나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성하진이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차남현은 학교에서 유명한 편이었다. 성적, 외모, 극단적으로 어려운 형편,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람이 요즘 매일 성하진한테 아침을 가져다놨다. 그것도 자기는 간단한 것만 먹으면서, 성하진 것은 매일 달랐다. 돈도 돈이지만, 신경을 쓴다는 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뭐 있어?" "있긴 있냐고! 얼른 털어놔." 성하진이 입을 열었다. "나사 빠진" "한 번만 더 그 말 하면 나 진짜야!" 성하진이 웃으며 아침을 집어들었다. --- 9반 교실. 차남현이 일찍 나와 문제를 풀고 있었다. 방과 후..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9화

성하진이 잠깐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적어도 젠븐을 돕지는 않아줄 수 있어요?" 상혁이 성하진을 봤다.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좋아요." 성하진이 눈에 힘을 풀었다. 안도의 기색이 역력했다. 상혁은 그 표정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렸다. --- 이틀이 지나고, 박시온이 응급수술실로 들어갔다. 재출혈에 두개내 감염. 개두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몸 상태가 너무 오래 악화돼 있었다. 의사는 수술을 하더라도 예후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차남현은 허락했다. 고민이 없었다. 포기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수술은 두 시간이 채 안 돼 끝났다. 의사가 나왔다. 차남현이 비틀거리며 걸어가 마주쳤다. 의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차남현이 그 자리에 굳었다. --..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8화

성하진이 그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차남현이 낮게 물었다. "무섭지 않았어요?" "무섭긴요, 총 있는데." "상대도 있었잖아요." 성하진이 실실 웃었다. "내가 쏠 수 있으면 되죠. 그 사람들이 거기서 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차남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위안이었다. 상황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차남현도 알았다.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최악의 각오를 한 거였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차남현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등 아파요?" 그 말에 성하진이 뒤를 실제로 의식했는지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아직도 화가 나는데 한 발만 더 쐈어도 됐는데." 표정은 징그럽다는 듯이었지만 솔직했다. 차남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가 내려앉았다. 수려하..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7화

문을 두드리자 차남현이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성하진이 발을 멈췄다. 불이 꺼진 거실 한가운데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성하진은 잠시 멍하게 섰다. 오늘이 원래 성하진의 생일이었다. 기억 속에는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차남현이 뻣뻣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먼저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박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하진아, 남현한테 네 어머니 출장 중이라는 얘기 들었어. 혼자 지내는 것 같아서 아주머니가 조금 챙겨주고 싶었어. 생일 축하해." 차남현이 어색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박시온이 같이 불렀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날 때쯤, 성하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불을 껐다가 다시 불이 들어오자 성하진이 눈을 깜빡였다. "……감사해요..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6화

차남현이 가다가 멈췄다. 발이 저절로 서버렸다. 앞에 성서우 일행이 걷고 있었다. "성하진이 뭔 상관이야, 어차피 지금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 없잖아" "그런 말은 하지 마……" 성서우가 억지로 말리는 척했다. 차남현이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 없다.* 방금 성하진이 했던 말이 스쳤다. *네 집에서 잠깐 신세 져도 돼?* 그때 그냥 지나쳤다. 머릿속이 음성 파일로 꽉 차 있어서. 뭔가 생긴 건가. 차남현은 그 생각을 지우려 했다. 음성 파일에서 들은 그 말들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그걸 알면서 걱정이 앞서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한테 신세를 진 적 있는 사람이었다.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됐다. 차남현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섰다. ..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5화

성하진은 차남현과 성서우의 대화가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직 하교 전이었는데, 성희수한테서 연락이 왔다. 스워트가 직접 학교로 왔다. 집에 돌아오니 성희수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성하진이 굳었다. 경호원 중 한 명이 배신자였다. 성희수를 공격하려던 것을 다른 경호원이 막아냈다. "하진아, 나 S국으로 가야 해." 성희수의 얼굴이 창백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레슬리가 사고를 당했어." 헬리콥터가 추락해 바다에 떨어졌다. 레슬리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아르트 가문의 권력 싸움이 성하진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희수가 성하진을 꼭 안았다. "레슬리 법정 상속인이 나야. 가야 해.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사람들이 너한테까지 손을 뻗어. 내가 그쪽으로 가면 저 사람..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4화

식탁에는 음식이 따뜻하게 차려져 있었다. 경호원들이 자리를 비키자 세 사람이 어색하게 둘러앉았다. 밥을 먹는 동안 성하진은 티 나지 않게 차남현을 관찰했다. 아까 전 병원 앞이나 합숙소 앞에서 세우던 차가운 눈빛이나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밥을 먹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면서. 성하진은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됐다. 이 정도면 됐다.* 밥을 씹으면서 머릿속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임무 대상 차남현 흑화 수치 확인.] [현재 흑화 수치: 40.] 성하진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게 올라갔다. --- 식사를 다 먹고 차남현이 군말 없이 빈 그릇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성하진이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이 그릇들 싹 다 이번에 새로 산 거니까 그냥 두고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