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는 음식이 따뜻하게 차려져 있었다.
경호원들이 자리를 비키자 세 사람이 어색하게 둘러앉았다.
밥을 먹는 동안 성하진은 티 나지 않게 차남현을 관찰했다.
아까 전 병원 앞이나 합숙소 앞에서 세우던 차가운 눈빛이나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밥을 먹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면서.
성하진은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
*됐다. 이 정도면 됐다.*
밥을 씹으면서 머릿속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임무 대상 차남현 흑화 수치 확인.]
[현재 흑화 수치: 40.]
성하진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게 올라갔다.
---
식사를 다 먹고 차남현이 군말 없이 빈 그릇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성하진이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이 그릇들 싹 다 이번에 새로 산 거니까 그냥 두고 쓰세요."
차남현이 생소할 정도로 넓어진 주방을 한 번 무심히 둘러보고 낮게 응, 하고 대꾸했다.
"괜찮아요, 들어가 계세요."
"도울게요."
"됩니다. 옷 베려요."
성하진은 차남현의 퉁명스러운 만류에도 나가지 않고 옆에 서서 구경했다.
차남현이 능숙하게 물을 틀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성하진은 두 생애를 합쳐도 설거지를 열 번도 안 해봤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잘한다."
차남현이 수세미를 문지르다 말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성하진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거지하는 걸 보면서.
차남현은 이 기묘한 상황에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굳었다가, 허탈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웃어요."
"안 웃었어요."
성하진이 어이없다는 듯 틱 쏘아붙였다. 차남현은 굳이 더 반박하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성하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처럼 뭔가를 담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정교하고 예쁜 얼굴이, 낮에 병원 앞에서 해를 받을 때랑 지금이랑 또 달랐다.
차남현은 성하진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그릇으로 돌렸다.
---
성하진이 경호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집 안에는 차남현과 박시온 둘만 남았다.
간병인은 아침에 박시온이 돌려보냈다.
아들이 돌아온 이상, 자신은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니 괜찮다고.
그 비용을 고등학생 아들한테 계속 감당시킬 수 없었다.
차남현이 물 한 잔을 챙겨다 드리고 오늘 가져온 검사 결과지를 들여다보는데, 박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현아. 이번에 성 소년이 우리한테 많이 도와준 거지?"
낮에는 이름을 불렀지만 박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 소년의 배경이 자신이 상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는 걸.
차남현이 잠깐 멈췄다가 낮게 응, 했다.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돼? 그 아이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널 도와준 걸까?"
세상에 대가 없는 공짜 호의는 없다는 걸 박시온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들이 그 소년에게 무슨 터무니없는 대가를 약속한 건지 걱정됐다.
차남현은 적당히 친구 사이라고 핑계를 찾다가 어머니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상기했다.
어설프게 둘러대면 오히려 더 불안해할 뿐이었다.
천천히, 건조하게 말했다.
"저보고 자기 남자친구 행세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박시온이 멈칫했다가 이내 이해가 됐다.
아, 그런 거구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이없어서 웃음도 나왔다.
그 소년이 낮에는 예의 바르고 의젓하더니만, 이런 철없는 면이 있었나.
"남현아……."
박시온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계속 짐이 되고 있어서."
"쓸데없는 말."
차남현이 즉각 차갑게 잘라냈다.
박시온이 허탈하게 웃었다.
"엄마가 뭘 어쩌겠어. 그냥, 잊지 마. 이번에 그 아이한테 도움받은 건,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거. 어떤 방식으로든."
"알아요."
박시온이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너도 아직 어린 나이잖아. 그 소년도 그렇고. 아무리 가짜 계약이라도 마음이 쉽게 흔들릴 때야. 네가 잘 판단해."
차남현이 눈을 들어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직시했다.
"알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박시온이 단호한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성적인 아이가 남의 장난에 마음 휘둘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이성적인 것도 걱정이었다.
따뜻하게 사람을 받아들일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애틋한 마음도 있었으니까.
어머니의 그 복잡하고 애처로운 속마음을 차남현은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
차남현 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성하진의 신경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머니 성희수가 방에 틀어박혀 뭔가 속을 새까맣게 끓이고 있었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였고, 억지로 웃는 표정이 매일 조금씩 어두워졌다.
경호원들도 눈에 띄게 날이 서서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시스템으로 확인해 보니 S국 본가의 레슬리가 마침내 아르트 가문 내부의 사촌 세력과 정면으로 맞붙은 상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 말리는 권력 싸움이었다. 힘의 균형이 팽팽해서 오히려 더 살얼음판 같았다.
레슬리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성희수 명의의 K국 계좌로 막대한 비자금을 이체해 둔 상태였다.
그 남자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성희수는 아들한테 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눈에 띄게 뺨이 야위어 갔다.
성하진은 모르는 척하며 평소처럼 무심히 학교를 오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위안이 되는 건, 레슬리가 적어도 독은 피했다는 거였다.
원작 시나리오보다 훨씬 나은 출발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달라진 게 분명 있었다.
---
한편 학교에서 성서우는 조금씩 자리를 회복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는 데는 타고난 영리한 사람이었다. 동정심을 자극하며 위기를 수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고태윤만큼은 달랐다.
사건 이후로 고태윤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주쳐도 벌레 보듯 시선을 피했다. 성서우가 먼저 말을 걸어도 벽을 치듯 짧게만 받아쳤다.
그날 아침, 어머니 주혜숙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 도시락을 성서우 손에 쥐여주며 고태윤한테 갖다주면서 다시 꼬셔보라고 했다.
성서우는 속으로 덜덜 떨리는 긴장을 숨기고 억지로 웃으며 고태윤 반으로 갔다.
교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화사하게 웃고 들어온 성서우를 보며 힐끔힐끔 눈빛을 교환했다.
과거 자작극은 있어도, 고태윤이랑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성서우가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태윤이 형은 원래 오래 알던 각별한 사이잖아.*
고태윤은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낀 채 무심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성서우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책상에 예쁜 샌드위치 상자를 놓았다.
"엄마가 너 아침 거르지 말라고 챙겨달라고 하셔서 가져왔어."
고태윤이 고개를 들고 가식적으로 웃는 성서우를 봤다.
그리고 불쾌한 듯 미간을 확 좁혔다.
주변 아이들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성서우는 고태윤이 넘어가 주면, 무언가가 다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에 안도의 숨을 내쉬려 했다.
그때 고태윤이 샌드위치 상자를 차갑게 밀어 돌려보냈다.
"고마워. 근데 나 이미 먹었어. 가져가."
성서우의 입가가 굳었다.
당황을 숨기고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
"그, 그럼 나중에 먹어. 가져왔는데."
돌아서려는데 손목이 콱 잡혔다.
샌드위치 상자가 도로 성서우 손에 강제로 쥐여졌다.
고태윤이 얼음 같은 목소리로 짧게 통보했다.
"다음에도 안 가져와도 돼. 부담스럽다."
성서우는 모멸적인 거절에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수치심에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구경하는 주변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게 느껴졌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알겠어."
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뱉고 성서우가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갔다.
고태윤은 쫓겨나는 그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과거에 저 가증스러운 애를 천사인 줄 알고 챙겼던 기억이 떠오를수록, 자기 자신이 바보 같았다.
덮어놓고 사람을 믿었다는 게 역겨웠다.
지금은 더 잘해줄 마음이 1그램도 없었다. 이렇게 선을 긋고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점잖게 대한 거라고 생각했다.
---
그 시각, 차남현이 성하진 반 앞 복도로 찾아왔다.
큰 손에 보온병과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손수 정성껏 만든 딤섬이었다.
복도를 걸어오면서도 망설였다. 성하진이 평소 어떤 차원이 다른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서민적인 평범한 음식을 불쑥 내밀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선이 쏠리는 교실 안으로 불쑥 들어가는 건 부담스러워서 전화를 걸어 불러냈다.
성하진이 삐딱한 자세로 문을 열고 귀찮은 듯 나왔다.
차남현이 말없이 무뚝뚝하게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어머니가 고맙다고 이거 꼭 전해주라고."
성하진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봉투를 열었다.
보온병 안에 정갈하게 빚은 딤섬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성하진이 망설임 없이 손으로 딤섬 하나를 푹 집어 곧바로 입에 넣었다.
한 박자.
"……야, 어, 이거 진짜 맛있다."
볼을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부풀리고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재빨리 또 하나를 집어삼켰다.
"아주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 맞지? 진짜 맛 좋다."
차남현은 비웃을 줄 알았던 성하진의 의외의 격한 반응에, 자기도 모르게 어깨의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걸 느꼈다.
"……네."
성하진이 입안 가득 씹으면서 웅얼웅얼 말했다.
"앞으로 아주머니 이렇게 맛있는 거 만드시면 꼭 가져다줘. 대신 진짜 맛있게 잘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전해줘."
"나한테는요?"
이 무거운 걸 들고 온 건 나인데.
그 말이 나오고, 차남현이 본인이 뱉어놓고도 흠칫 놀라 스스로 순간 멈췄다.
이상하고 찌질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성하진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배달부잖아요."
차남현은 어이가 없어서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의 당혹감도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
그 평화로운 장면을 복도 끝 사각지대에서 성서우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전 고태윤한테 면박을 당한 뒤, 멘탈이 붕괴되어 발걸음이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그 수치심과 화가 전부 성하진을 향한 증오로 쏠려 있는 상태였다.
모든 게 저 성하진 새끼 때문이었다. 시작이 성하진이 분탕질 치지 않았으면 이렇게 나락으로 처박히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 저주 퍼붓는 마음으로 우연히 성하진 반 쪽을 돌아봤다가, 익숙한 차남현을 발견했다.
전교 1등. 외형도 나쁘지 않은데 워낙 사람을 피해 다녀서 주변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알파.
그 콧대 높은 차남현이, 성하진 앞에 서 있었다.
성하진은 뭔가를 먹으면서 세상 자연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차남현은 묵묵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하진을 담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웠다.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성서우는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쪽에서는 이렇게 비참하게 잃는데, 저쪽에서는 저렇게 다 얻고 있었다.
차남현이 짧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복도를 걸어 성서우 쪽으로 오는 방향이었다.
성서우가 뱀처럼 음산한 눈빛을 하고 차남현의 앞을 불쑥 가로막고 나섰다.
차남현이 성서우를 보고 불쾌한 듯 미간이 확 좁아졌다. 벌레 피하듯 옆으로 빙 돌아가려 했다.
성서우가 한 발 더 내디뎌 차남현의 진로를 악착같이 막아섰다.
"요즘 성하진이랑 많이 친해졌네. 뭐, 친구라도 된 거야?"
차남현이 벌레를 보듯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관계없는 일이에요. 비켜요."
성서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교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것 좀 한 번 들어봐."
과거 성하진을 엮어 모함하기 위해 교묘하게 저장해 뒀던 음성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차남현은 미친놈 취급하며 꺼두려다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과거, 빙의 전 원래의 '성하진'이 내뱉었던 악독한 목소리가 복도에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차남현? 매일 길고양이처럼 구질구질하게 돌아다니는 주제에 감히 고태윤 선배랑 비교가 돼? 기분 더럽게."]
["자존심? 걔가 무슨 자존심? 가난에 치여서 등이 휠 때도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 있는지 한 번 지켜보자고."]
["도와줘? 웃기고 있네. 그냥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거지. 재밌잖아, 이런 게."]
["걔 알바 자리는 내가 다 돈 풀어서 막아놨어. 나 말고는 주변에서 단 돈 십 원 하나 벌 데가 없게 묶어놨다고. 그럼 내 밑으로 기어들어 와서 내 말 안 들을 수가 없지, 안 그래?"]
차남현은 그 끔찍한 음성을 듣는 내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치직 소리와 함께 음성이 뚝 끊겼다.
성서우가 득의양양하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조롱하듯 차갑게 웃었다.
"감사하는 거 아니겠지? 걔가 치밀하게 네 알바 자리 싹 다 없애놓고 돈이 없어지면 자기한테 오게 만든 거잖아.
네가 성하진한테 진 그 피눈물 나는 빚이 지금 얼마야?"
차남현이 그제야 바닥에 고정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성서우를 서늘하게 직시했다.
"그러면 너는 뭐가 목적이야?"
성서우가 예상외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당황한 듯 잠깐 말문이 막혔다.
차남현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단단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이런 걸 들려줘서 내가 뭘 어떻게 장단 맞춰서 춤추길 바라는 건데."
그리고 더 이상 이 쓰레기 같은 이간질에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 무심히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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