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3화

울다미 2026. 5. 9. 01:20

한씨 어르신이 침통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차남현의 무릎 위에는 두꺼운 앨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앨범 속에는 세 가족의 단란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기품이 흘러넘치는 사진 속 젊은 알파가 바로 그의 친부였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소름 돋을 만큼 빼닮아 있었다.

사진 속에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오메가가 어린 남현을 안고 그네에 앉아 있었고,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선 남자의 눈빛은 아내와 아들을 향한 지독한 애정으로 뚝뚝 묻어났다.

"……그날, 네 부모를 습격한 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돈이 아니었다. 
네 부모는 피를 흘리며 쫓기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널 숨겼어. 
납치범 놈들도, 그리고 나조차도…… 널 찾지 못하게 말이다."

한씨 어르신의 탁한 눈동자에 붉은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네 아비와 어미가 어떻게 널 무사히 빼돌렸는지……."

수십 년이 지난 일임에도, 노인의 이마엔 굵은 핏대가 솟았고 눈시울은 핏빛으로 붉어져 있었다.

노인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지만, 차남현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제 친부모가 얼마나 처참하게 살해당했는지.

한씨 어르신이 무겁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늙고 병들었다. 이 집안은 너무 거대해. 피를 나눈 친척이라는 작자들도 각자 제 주머니를 채울 궁리뿐이지. 
네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던 놈들이, 세월이 흐르니 그게 원래 제 것인 양 착각하며 살고 있다……."

차남현은 사진 속 세 가족의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어르신이 떨리는 손으로 남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내 손자야……. 널 찾았으니, 이 할애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네 부모 곁으로 가기 전에, 내 남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지켜 주마."

노인의 눈동자에서 과거 사교계를 피로 물들이며 군림했던 무자비한 포식자의 살기가 형형하게 빛났다.

"남현아. 넌 하루빨리 온전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당장 뒈졌어야 할 버러지들이, 내 그늘 아래서 너무 오래 숨을 쉬며 살았어……."

잠시 후,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재 문을 열고 연회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때, 하인 하나가 다가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 도련님. 총괄 집사님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성씨 성을 가진 손님 한 분이 도련님을 뵙고자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성씨라고요?"

한씨 어르신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오?"

차남현의 눈빛이 한 순간 살아났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가라앉았다.

"제가 가서 만나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잠시 후에 뵐게요."

한씨 어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차남현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

성하진은 소파에 앉아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씨 가문의 역사가 깊다는 건 자리 배치와 손님들 면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성하진은 S국 재벌 집안 출신이라 이런 자리가 낯설지 않았다. 

그 기억을 물려받은 성하진도 주변 광경에 딱히 압도되는 게 없었다.
그렇게 홀로 앉아 있으니 수작을 거는 사람이 나타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양복을 빼입은 남자가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

"혼자이신가요?"

성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바싹 다가오며 앉으려 했다.

"저는 김성현이라고 합니다, 청운 테크가 저희 집이에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성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한마디를 뱉었다.

"꺼져요."

김성현이 순간 굳었다가 비웃음을 날렸다.

"예의 없이 구는군요. 술이나 한 잔 하죠."

잔을 들이밀었다. 성하진이 잔을 받아들었다. 
김성현의 표정에 득의가 번지는 순간, 성하진이 그 술을 그 얼굴에 뿌렸다.

"멍청한 놈."

김성현이 분노로 얼굴이 굳어졌다. 
손을 내밀어 성하진을 잡으려 했다.

성하진이 그 손목을 낚아채 비틀며 뺨을 갈겼다.
찰싹 소리가 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김성현이 발을 걷어차였다. 
배까지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을 내뱉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그 손목을 잡아채 뿌리쳤다.

김성현이 뒤를 돌아봤다. 
검은 정장의 창백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 옆에 집사가 공손히 서 있었다.

"한 도련님."

김성현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차남현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가요."

김성현이 입을 달싹이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을 굳힌 채 물러났다.
집사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제가 입구를 소홀히 했습니다."

차남현이 손을 들었다. 집사가 알아듣고 물러났다.
소파 쪽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성하진이 차남현을 봤다.
할 말을 반나절이나 준비했는데, 막상 마주치자 전부 사라졌다.

대신 나온 말은 이거였다.

"왜 이렇게 안색이 나빠요. 아파요?"

차남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말이 없었다.
표정이 차가웠다.

성하진이 그제야 현재 상황으로 돌아왔다. 
입문하기 전에 시스템으로 확인했다. 흑화 수치가 80이었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에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건……고의가 아니었어요. 
집안에 어떤 일이 생겨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을 무시하거나 창피 주려는 게 아니었고요."

한 박자 멈추고 이었다.

"내가 잘못한 건 맞아요. 그래서 직접 와서 사과하는 거고."

차남현이 눈썹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어조가 평탄했다.

"다 했어요?"

"……네."

차남현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말 두마디 하면 내가 또 용서하고 끌려다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너무 높이 보는 거 아닌가요."

성하진이 멈칫했다.
그때 옆에서 나이가 있는 중년 남자가 걸어왔다.

"아남."

차남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고개를 돌리며 형식적으로 인사했다.

"작은아버지."

한강천이었다. 현재 한씨 가문을 대리 운영하는 인물. 
그리고 한강성이 쓰러진 이후 이 자리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번에 차남현이 독을 탄 의혹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씨 어르신 측 사람들이 이미 꼬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강천의 표정은 자상했다. 관심 많은 어른의 얼굴이었다.

"아남, 이쪽은 누구야?"

차남현이 성하진을 봤다. 그 시선이 담담하다 못해 냉랭했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하진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차남현이 이었다.

"전에 한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고 최소한의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닌지 생각해 봐요."

성하진이 굳었다.

한강천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남, 여자한테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되지."

그 순간 성하진은 판단했다.

지금은 안 되겠다.

억지로 풀려고 할수록 더 꼬인다. 레슬리가 이번을 버텨냈으니 최소한 자신이 위험한 상황은 넘어갔다. 
흑화 수치 문제는 나중에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됐다.

성하진이 차남현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 나 먼저 갈게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 돈 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진짜로."

차남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하진이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

---

한씨 가문 정문 앞에서 차를 잡으려는 순간, 맞은편 도로에 익숙한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
상혁이었다.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려 했다. 
그 순간 옆에서 몇몇 사람이 나타나 앞을 막았다. 레슬리 측 인원이었다.

동시에 한 대의 차가 성하진 바로 옆에 멈춰 섰다.

스워트였다.

차 문을 돌아서 열어주며 말했다.

"아르트 영애, 비행기 준비됐습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때 시스템이 울렸다.

[젠븐 측 인원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다음 순간이었다.

스워트의 가슴에 붉은 것이 번졌다.
총성은 소음기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스워트가 쓰러졌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 반격했다. 
그러나 다른 방향에서 차 한 대가 급제동하며 성하진 옆으로 달라붙었다.

맞은편에 있던 레슬리 측 경호원들이 총을 쏘며 달려왔지만, 성하진은 이미 큰 손에 잡혀 차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발이 허공을 찼다. 아무 소용도 없었다.

차 문이 쾅 닫혔다.
손이 등 뒤로 묶였다.

뒷유리 너머로 스워트가 추격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 도로에서 상혁이 차를 몰아 뒤를 쫓는 것도.

---

절벽 위였다.
성하진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골랐.

눈앞은 아득했다. 
발 아래로 경사가 이어졌고, 그 끝은 바다였다.

*이게 재벌 집안이다. 나는 왜 이런 곳에서 태어난 몸에 들어온 거야……*

핸드폰이 얼굴 앞에 들이밀렸다. 화면에 영상통화가 연결되고 있었다.

납치범이 차갑게 말했다.

"레슬리 씨, 시간은 3분입니다. 
3분 내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아르트 영애는 뒤에 있는 절벽 아래 바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화면 안에 레슬리가 보였다.

평소엔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눈에 감당 못 할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외국어로 계속해서 반복했다.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지 마."

그러다 영상에 성하진이 보이자마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진아, 아이비……겁내지 마, 아빠 여기 있어."

성하진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방법 없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아들 걱정만 하는 사람.

납치범이 말을 이었다.

"레슬리 씨, 앞에 있는 서류에 서명해 주십시오."

누군가 레슬리 앞에 서류 묶음을 밀었다.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슬리의 얼굴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레슬리는 한 박자도 망설이지 않았다. 
펜을 잡았다. 서류를 빠르게 넘기며 전부 서명했다. 

마지막 장을 끝내고 고개를 들며 낮게 말했다.

"내 아들 내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