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1화

울다미 2026. 5. 8. 17:09

거래를 수락한 다음 날부터, 성하진은 차남현이 사다 준 아침을 입에 대지 않았다.

차남현이 보내는 메시지도 무시했고, 걸려 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직접 만나서 확실하게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차남현의 얼굴을 보고 그 잔인한 말을 내뱉을 상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수많은 잘생긴 알파들을 아무렇지 않게 차버렸으면서. 

천하의 바람둥이 오메가 성하진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죄책감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라리 번호를 차단해 버릴까. 

액정 위로 손가락을 몇 번이나 미끄러뜨렸지만, 
그간 차남현과 함께 웃었던 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끝내 차단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차남현은 기어코 학교 정문에서 하진을 막아섰다.

"성하진……."

차남현은 가만히 서 있었다. 겉보기엔 담담해 보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깊은 혼란과 불안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생긴 거야?"

그 순간, 하진은 제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짓눌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몇 분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마침내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내뱉었다.

"우리 헤어지자."

차남현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텅 비었다가, 이내 멍한 빛을 띠었다.

"……왜?"

그는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만약 그런 거라면, 적어도…… 이유는 말해 줘야지……."

하진은 도저히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며 억지로 딱딱하게 대꾸했다.

"아니, 네 잘못 아니야. 그냥 우리가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래."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리려는데, 차남현이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가 안 맞는데?"

차남현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 말을 내뱉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 그동안 좋았잖아."

그때, 하진의 시야에 도로 건너편으로 미끄러지듯 멈춰 서는 마이바흐 한 대가 들어왔다.

상혁의 차였다.

하진은 속으로 낮게 욕설을 씹어 삼켰다.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어, 차남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나 약속 있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마이바흐 뒷좌석에 올라탔다.
상혁은 여유로운 태도로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른 체구의 소년을 흘끗 보고는, 이내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출발해."

마이바흐가 매끄럽게 도로를 빠져나갔다.
차남현은 멀어지는 차에서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아침, 차남현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등교했다. 
그가 하진의 자리에 아침을 올려두려 할 때, 하진의 짝꿍인 유연이 먼저 와 있었다.

차남현을 본 유연이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남현아. 그냥 그만둬라. 네가 며칠째 두고 간 거, 하진이가 입도 안 대고 다 버렸어. ……돈 아깝게 뭐 하러 계속 사."

차남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집스럽게 샌드위치와 우유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나갔다.
교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유연은 혀를 차며 이를 악물었다.
진짜 성하진 저 미친놈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멀쩡한 애를 왜 건드려서는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놔? 
실컷 흔들어 놓고 이제 와서 내동댕이치는 꼴이, 제3자인 유연이 보기에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유연이 팔을 걷어붙이며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하진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아침을 버리는 대신 제 서랍장 안에 얌전히 밀어 넣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진은 의심스러운 유연의 시선을 무시한 채,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조금 전, 차남현에게서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은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방과 후에 같이 가자. 할 말 있어.]

하진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과 후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도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가 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그리고 하진은 유연에게서 사진 한 장이 첨부된 메시지를 받았다.

사진 속에는, 학생들이 전부 빠져나간 텅 빈 학교 정문 앞에 우산을 쓰고 우두커니 서 있는 차남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 주번 끝내고 집에 가는데, 쟤 아직도 저기 있더라. ㅋㅋㅋ]

하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새끼는 진짜 미련하게 왜 저래?’

그는 아예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질수록 속이 홧홧하게 끓어올랐다. 

결국 하진은 신경질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실내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급하게 콜 택시를 불러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차남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진은 우산을 든 채 빗물에 흠뻑 젖은 제 바짓단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엄청난 등신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장 별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비를 피할 겸 근처에 새로 개업한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나 한잔하며 비가 멎기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새로 연 카페 한쪽 벽면에는 ‘디지털 소원 벽’이라는 게 설치되어 있었다. 
전광판 위로 메시지가 하나씩 스크롤 되어 나타났는데, 글귀 옆에는 캠으로 순간 포착된 작성자의 우스꽝스러운 얼굴 사진이 함께 떠올랐다.

하진이 무심코 쳐다본 순간, 눈이 동그란 귀여운 오메가 후배의 해맑은 사진과 함께 글귀가 지나갔다.

[아이스 바닐라 라테 존맛탱...]

다음은 안경을 쓴 모범생 알파가 비장한 표정으로 남긴 메시지였다.

[기말고사 전교 100등 진입 가자.]

연달아 스크롤 된 다음 메시지 역시 그 모범생이었다.

[...정정함. 50등만 올라도 감지덕지.]

이어서 노란 머리의 불량해 보이는 베타 남학생이 눈치를 살피며 찍힌 사진이 떴다.

[이번 주 안에는 무조건 이도훈한테 고백한다...]

곧이어 화면이 넘어가고, 노란 머리 남학생의 경악에 찬 얼굴이 나타났다.

[미친, 이거 다 사진 찍히는 거였어? 삭제도 안 되네, 아 씨발...]

쉴 새 없이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뻘글과 웃긴 표정들을 멍하니 보던 하진은, 
슬그머니 기계 앞으로 다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렸다.

[차남현 개새끼!]

엔터 키를 누르자,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묘한 쾌감이 일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성이 돌아오자 덜컥 후회가 밀려왔다.

사실 하진도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문을 위해 그를 내친 건 온전히 제 쪽이었다. 

그런데도 남현은 매일 아침을 챙겨 주고, 약속을 바람맞고도 폭우 속에서 미련하게 저를 기다렸다.

‘그래, 내가 천하의 나쁜 놈이지…….’

하진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기계 앞으로 다가가 재빠르게 한 줄을 더 입력했다.

[차남현 요리 개잘함. 완전 벤츠 알파!]

비가 그치자, 하진은 반쯤 남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 카페를 나섰다.

다음 날, 하진은 상혁의 파트너 자격으로 한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

단지 상혁의 비위를 적당히 맞출 요량으로 온 자리였는데, 설마 연회장에서 차남현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웨이터 복장을 한 남현은 알바를 하는 게 분명했다.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 길게 뻗은 다리. 
소년의 앳된 태를 벗고 어엿한 알파로 성숙해 가는 그의 자태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남현을 발견한 하진이 기겁하며 상혁의 팔을 잡아끌고 반대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맞은편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보석과 정장으로 치장한 채 귀티를 뿜어내는 하진을 발견한 남현은, 
흠칫 굳어지더니 이내 들고 있던 트레이를 내려놓고 인파를 헤치며 다가왔다.

하진의 속에서는 ‘씨발 좆됐다’라는 비명이 맴돌았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곁에 선 상혁은 하진을 붙잡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물었다.

"뭘 그렇게 피해?"

하진은 하마터면 면전에 대고 쌍욕을 뱉을 뻔했다.

‘네놈 피한다, 개새끼야.’

어느새 남현이 하진의 눈앞에 멈춰 섰다.

"왜 연락도 안 받고, 만나 주지도 않는 거야?"

차남현은 하진이 다른 알파의 팔을 엮고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올렸다.
사실 이 지경까지 왔으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미련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는 거의 자학에 가까운 심정으로 끝까지 대답을 요구했다.
하진이 입을 떼기도 전에, 곁에 있던 상혁이 선수 치듯 물었다.

"하진아, 이분은 누구셔?"

상혁의 목소리에 깔린 무언의 압박을 느낀 하진은 짧게 숨을 들이켜고는, 체념한 듯 답했다.

"……학교 동창이에요."

상혁이 나직하게 웃었다.

"아, 동창이구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이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차남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 뼈를 깎아내듯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

"그냥…… 동창이라고?"

겉보기엔 잔잔한 파도 같았지만,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처참한 속을 대변하고 있었다. 
남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하진을 응시했다.

하진은 수많은 알파를 뻥뻥 차버리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놈들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독한 오메가였다. 
하지만 지금, 유독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현의 눈동자 앞에서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마음의 벽을 허물었는지, 또 얼마나 맹목적으로 제게 진심을 다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진이 바짝 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차남현."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이유만 말해."

남현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