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24화

울다미 2026. 5. 10. 01:10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습니다."

납치범이 느릿하게 말했다.

"지금 서랍 안에 있는 권총을 꺼내세요. 오늘 여기서 한 명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레슬리 씨와 아이비 영애 중 누가 될지, 당신이 선택하세요."

성하진이 굳었다.

화면 속 레슬리도 정지했다.

"레슬리 씨, 1분 30초 남았습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때 아들을 보내준다는 보장이 있소?"

레슬리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납치범이 미소를 흘렸다.

"선택지가 없으시잖습니까."

레슬리가 더 말하지 않았다.
성하진이 시스템을 불렀다.

[가능해? 살아남을 수 있어?]

시스템이 빠르게 답했다.

[초보자 보호 기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영애의 생명 안전은 보장됩니다.]

성하진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화면 안에서 레슬리가 권총을 들었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게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하진아, 눈 감아라……"

성하진이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안 돼요. 하지 마요."

납치범들의 시선이 전부 화면 쪽으로 몰려 있었다.

"47, 46, 45……"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레슬리가 다시 말했다. 
음색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눈 감아. 아빠가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해, 알겠지?"

성하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납치범들이 눈치채기 전에 몸을 틀었다. 
온 힘으로 달렸다.

레슬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비!"

납치범들이 욕을 내뱉으며 쫓아왔다.
레슬리가 살아있는 한, 이 사람들은 성하진에게 총을 쏘지 못한다. 마지막 협상 카드를 먼저 죽일 수 없었다.

누군가 경고 사격으로 발밑 땅에 총알을 박았다. 
하지만 성하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절벽 가장자리가 가까워졌다.
멀리서 차 헤드라이트가 쏟아지며 엔진 소리가 굉음을 냈다. 

여러 대가 동시에 접근해 왔다.
납치범들이 뒤에서 덮치려 몸을 날렸다.

빛이 절벽 위를 하얗게 물들이는 순간.
성하진이 뒤돌아보지 않고 몸을 던졌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남현이 그 장면을 봤다.
눈이 벌어졌다. 안쪽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앞으로 달렸다. 
집사와 경호원이 막아섰다.

"도련님!"

"비켜. 비켜요!"

팔을 뿌리쳤다. 또 잡혔다. 
발버둥 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이 새빨개졌다.

"성하진……"

그 순간 입 안에 뜨거운 게 올라왔다.

피였다.

눈앞이 흔들렸다.

"도련님, 도련님!"

"빨리, 안으로 모셔라!"

몸이 부축되는 게 느껴졌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회복도 안 된 몸에 심화가 치밀었다. 차남현이 다시 쓰러졌다.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같은 이름이 새어 나왔다.

"성하진……성하진……"

---

그 광경을 차 안에서 본 상혁의 눈이 순간 공백이 됐다.

멀쩡히 있다가 절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그게 자기 때문이었다.

뒤를 밟지 않았다면. 레슬리 측 경호원들이 상혁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 틈을 납치범들이 파고들지 않았을 거라면.

운전석 쪽 심복이 조용히 말했다.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혁은 알았다. 
아르트 가문의 아들이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새 가주가 된 레슬리가 어떻게 나올지를.

"바다 수색 인원 지금 당장 출동시켜."

일자 한마디를 뱉었다.

"이 해역 전부. 지금 바로."

심복이 즉시 응했다.

납치범들은 달려온 아르트 가문 경호원들에게 전원 제압됐다.
30분이 채 되기 전, 헬리콥터 여러 대가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탐조등이 절벽 아래 바다를 낮처럼 밝혔다.

---

5년 후, 서해시……

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아침. 
레스티 호텔 최고층 스위트룸은 커튼이 완전히 쳐져 있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흐릿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성하진, 하지 마……"

검은 그림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진정됐다.
 그제야 그 사람이 움직였다.

손을 들어 터치패널로 커튼을 열었다. 
막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아침 햇살 몇 가닥이 방 안으로 들어와, 차가운 공간에 조금이나마 온기를 더했다.

준수함을 넘어 아름답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다만 눈빛의 서늘한 위압감이 그 정교함을 조금 덮어버렸다.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또 그 꿈이었다.
매번 꿈은 선명했다. 

어제 일처럼.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미 꼬박 5년이 지나 있었다.
손을 뻗어 베개 밑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벌써 5년이었다.

이 5년이 더디게 흘렀다.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발 딛을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조금씩 권력을 모아가며,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결국 한씨 가문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름뿐인 작은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냈다.

20년 전 친부모가 납치된 사건, 그리고 한씨 가문에 복귀한 후 독살 시도까지. 
전부 그 작은아버지 한강천의 손이었다.

한강천은 지난해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집행 3개월 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그 얼굴이 평온했다. 
손자가 돌아왔고, 아들 내외를 해친 자가 대가를 치렀고, 한씨가 손자의 손에 들어왔다. 

한씨 어르신은 더 붙잡을 것이 없었다.
차남현은 4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함께한 할아버지를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됐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외롭다고 보지 않았다.
모두의 눈에 새 한씨 가주는 어린 나이에 강하고 냉정했다. 

감히 그에게 도전하려 했던 내부 세력들을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정리하고 나서는, 
이 젊은 수장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재계에서 그는 냉혹하고 무심한 알파였다. 
흔들리지 않는 수완, 틈 없는 대인관계. 

가장 강하고 정밀하면서도 감정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한밤중에 그가 패닉에 빠지고,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며, 뼛속까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는 걸.

베개 밑의 이 목걸이가 그와 5년을 함께했다. 
5년 전, 그가 직접 사람을 이끌고 그 해역을 꼬박 60일간 뒤졌다. 

아르트 가문이 S국에서 아이비 아르트의 장례식을 치른 뒤에도, 차남현은 믿지 않았다.
60일 동안 얼굴이 창백하게 야위어 갔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모습이었다. 

결국 할아버지의 손바닥이 뺨을 때린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잡은 뒤, 그는 직접 귀금속 거래소로 가서 그가 수술비를 만들려고 팔았던 목걸이를 되찾아왔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 시기에 그 사람의 상황도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부모가 S국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혼자 국내에 남아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걸.

그 상황에서 총 하나 들고 지하 격투장에서 자신을 꺼내줬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자신이 가진 패물을 팔면서도, 자기 처지가 얼마나 어렵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카페 디지털 소원 벽에서 그의 사진을 봤다.
자신이 혼자 고집스럽게 기다리던 그 시간에, 그가 와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한테 화가 났다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돌아서서 남긴 말이 있었다. 
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이 뭐가 좋다는 건지.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 버텨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5년 동안 차남현은 매일 생각했다. 
그날 밤 자신이 내쫓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놓아주라고. 네 탓이 아니라고.

지키고 싶었다. 진짜로. 그때 자신도 독을 맞아 위태로운 데다 사방이 위험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위험에 끌어들일 것 같아서 밀어냈다. 

그런데 결과는 그 손으로 죽음 쪽으로 밀어버린 것이었다.
5년 동안, 매번 한밤중에 그 사람이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장면을 보며 깨어났다. 

칼로 조각내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알람이 울렸다. 차남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시작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시 한씨 분사 건물.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차남현이 짙은 회색 정장 차림으로 나왔다. 

뒤에서 비서가 따라붙으며 빠르게 오늘 일정을 읊었다.
그때 앞에서 누군가 허리를 잔뜩 굽히며 다가왔다.

"대표님, 대표님,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차남현은 이미 이름을 한남현으로 바꿔 한씨 성을 정식으로 쓰고 있었다. 
한씨 수장이니 당연한 일이었고, 양어머니가 지어준 이름도 그대로 살렸다.

한씨의 젊은 대표가 서해시에 왔다는 소식에 직·간접적으로 만남을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 
예약 한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차남현이 차갑게 곁눈질했다.

비서가 빠르게 소개했다.

"대표님, 청성 미디어 조 대표님이십니다. 사전 예약은 되어 있는데, 오전 회의 끝나고 30분 뒤가 예약 시간이었는데요."

조태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대표님을 뵙는다는 생각에 너무 설레서 그만 일찍 오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너야? 차남현?"

성서우는 지금 청성 미디어의 간판 배우였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조태성이 그래서 그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한씨의 젊은 대표는 재계 잡지에도 잘 나오지 않았고, 간혹 찍혀도 멀리서 찍힌 옆 얼굴뿐이었다. 
대중이 실물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성서우는 예전에 사진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 옆 얼굴이 고등학교 동창 차남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한남현'으로 딱 한 글자 차이였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진짜로 같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유명했던 빈곤 학생이 한씨 재벌 수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