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수가 잠깐 생각하다가 윤월하에게 말했다.
"무현을 드라마에서 빼요."
윤월하가 뒤를 돌아봤다.
무현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윤월하가 이를 악물었다.
"……알겠어요."
주문학이 생각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임지수가 챙기는 게 자기 몫이라는 것이.
속이 뜨거워졌다. 그러고는 윤월하를 똑바로 봤다.
"촬영 끝날 때까지 임지수한테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윤월하가 핸드폰을 들고 씩 웃고 있는 성하진을 힐끗 봤다.
이를 악물었다.
"……맹세할게요."
성하진이 짧게 혀를 찼다.
"아, 그리고 다른 사람 남자친구랑 뒤에서 그러고 다닌 건 아직 사과도 안 하셨네요, 윤 씨."
윤월하의 얼굴빛이 더 나빠졌다.
한참 침묵하다가 이 사이로 겨우 세 글자를 뱉었다.
"……미안해요."
주문학이 성하진을 밀었다.
"됐어, 가자."
성하진이 윤월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영상을 삭제하고 캐시까지 비웠다.
그제야 윤월하가 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성하진이 생각난 듯 물었다.
"모기야, 무현이가 지난달에 너한테 돈도 빌렸다고 했지? 갚았어?"
주문학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됐어, 그냥 수업료로 생각할게."
성하진이 눈썹을 올렸다.
"왜 됐어. 그 돈으로 유기묘 후원하면 얼마나 좋아. 왜 저런 쪽에 써줘야 해."
주문학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미 피멍이 든 얼굴의 무현을 향해 말했다.
"85만 원, 빨리 줘요. 뻔뻔함도 참 어지간하네."
무현이 얼굴을 굳히고 한참 버티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지금 없어요."
주문학이 미간을 좁혔다.
성하진이 픽 웃었다.
"없으면 차용증 써요. 지금 바로."
윤월하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현이 인상을 쓰며 옆 테이블에서 펜을 집어들었다.
이를 악물고 차용증을 썼다. 주문학이 다음 달 상환일을 확인하고 조용히 챙겨 넣었다.
그제야 세 사람이 돌아섰다.
---
매니저는 윤월하한테 뺨을 맞고 눈물을 닦으며 나갔다.
휴게실에는 윤월하와 무현 둘만 남았다.
무현이 풀이 죽은 얼굴로 다가갔다.
"선배, 저 정말 버리는 건 아니죠?"
윤월하가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어. 다음 기회 봐."
무현이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현도 알고 있었다. 윤월하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저예산 웹드라마에서 여자 2번이라는 게 전부였다. 진짜 배경이 있었으면 여주 자리에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윤월하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발판이었다.
---
한편 성하진 세 사람은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주문학이 아직 불안한지 중얼거렸다.
"윤월하가 진짜로 지수 건드리지 않을까?"
임지수가 웃었다.
"괜찮아."
성하진이 손을 흔들었다.
"그 사람이 그 정도 파워가 있었으면 여주였겠지. 생각해봐요."
주문학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다행이다."
임지수가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얼굴 한구석이 여전히 좀 어두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보면 보였다.
자기 발로 길을 닦아온 사람이라 자본의 개입이 가진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성하진이 임지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됐어, 그만 생각해. 이 웹드라마 안 찍어도 돼. 내가 자리 알아봐줄게."
임지수가 실소를 흘렸다.
"아이비가 무슨 자리를 알아봐줘."
주문학이 장단을 맞췄다.
"에이, 당연히 국제 자원이죠. 데뷔하자마자 폭발하는 거."
성하진이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알았어?"
임지수와 주문학이 웃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임지수가 진지한 척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진화자 얼라이언스 3. 이번에 무당 아차 캐스팅 중이잖아.
나 만화에서 무당 아차 진짜 좋아했거든. 1선 배우들도 다 들어갔다는 얘기 들었어."
성하진이 임지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외형은 문제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오디션 준비 잘 해. 연기만 무너지지 않으면 그 자리 당신 거야."
임지수가 웃음기를 지우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겠어."
성하진이 한숨을 쉬었다.
"진심이에요. 농담 아니야."
주문학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아, 우리 다 진지해요."
"아, 그리고 아이비. 오늘 우택현 조퇴했대. 못 볼 것 같아."
성하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덕질할 사람은 세상에 넘쳐."
임지수와 주문학이 또 한 번 어이없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임지수가 촬영장으로 돌아가고, 성하진과 주문학은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주문학을 학교에 내려주고 성하진은 방향을 돌려 회사로 향했다.
---
이건 레슬리가 요구한 것이었다.
성하진이 4년 내내 집에 거의 얼굴을 안 비추자, 레슬리와 성희수가 어차피 그럴 거라면
가문 후계자 교육이라도 받으라며 K국 내 계열사 말단 실습을 강제로 꽂아버렸다.
성하진은 귀찮아서 상속권을 포기하겠다고 했다가 두 사람을 동시에 폭발시켰다.
레슬리가 제시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 상속권 포기. 대신 가문 지원도 없음.
진짜 독립.
둘, 2년 더 자유롭게 살되, 아르트 계열사 말단부터 실습하면서 복귀 준비.
성하진은 진짜 혼자 먹고사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그냥 귀찮은 거였다.
결국 강권에 굴복해 아르트 계열 변전 설비 제조사 CBB에 영업 매니저로 들어갔다.
오늘이 주말인데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
CBB 서해시 분사.
성하진이 외국어 실력으로 영업 매니저 자리를 얻었다. 말이 매니저지 그냥 영업 사원이었다.
이번 달에 꽤 큰 기회가 왔다. 청운 테크 쪽에서 수십억 규모 변전 설비 주문 건이 있었다.
그쪽에서 기술 세미나를 열기로 했고, 성하진의 부서가 이 건을 맡게 됐다.
부서 팀장 구현서가 성하진한테 주말에 세미나용 자료를 준비하라고 했다.
다음 주 월요일 세미나가 있으니 그전에 PPT와 각종 데이터를 정리해 두라는 것이었다.
말단 신입이라 군말 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 내내 구현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애매한 부분이 생겨 전화를 했더니, 알아서 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리고 월요일, 청운 테크 세미나장에서 구현서를 만나서야 알았다.
청운 테크는 이미 다른 업체와 협력 의향이 잡혀 있다는 것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준비한 자료가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뜻이었다.
구현서는 이미 그걸 알면서 성하진에게 일을 시킨 것이었다.
성하진이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구현서가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신입한테 좋은 경험이 됐겠지, 안 그래요?"
성하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먼저 세미나장 안으로 들어갔다.
---
사실 구현서가 성하진에게 처음부터 이렇게 군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대했다. 그러다 어느 날 구현서가 40만 원짜리 식사 영수증을 성하진한테 밀며 시스템에 입력해달라고 했다.
자기 이름으로 접대비 항목에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성하진이 접대 내역을 물으니, 그냥 아무렇게나 써 넣으라고 했다.
자기와 팀장 이름으로 올리는 거니 위에서 안 물어볼 거라며.
성하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챘다. 그건 구현서의 개인 소비를 회사 공금으로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팀장이 구현서 처남이라 결재 라인 걱정도 없고, 만약 나중에 감사라도 들어오면 성하진이 뒤집어쓰는 구조였다.
거절했다.
그 이후로 구현서는 틈만 나면 성하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팀장도 그냥 눈 감고 있었다.
성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발표 자료를 다시 한번 훑었다.
---
세미나장에서 각 사별 발표가 순서대로 이어지는 동안, 별관 회의실에서는 청운 테크 임원진 전원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최상석에 차남현이 등받이에 기대어 청운 테크 마케팅 부대표의 경영 보고를 듣고 있었다.
청운 테크는 한씨 계열 변전 설비 자회사였다.
한씨 전반이 이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고 특히 해외 시장을 열면서 관련 자회사들이 크게 수익을 냈는데,
청운 테크만 유독 성과가 아쉬운 수준에 머물렀다.
마침 서해시에 올 일이 있던 차남현이 사전 통보 없이 바로 들이닥쳤다.
이 자리에 있는 임원들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과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작년 실적이 한씨 계열 자회사 중 꼴찌였다.
언제 문책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는데, 하필 수장이 직접 나타났다.
차남현이 요구한 보고 형식은 단순했다.
각자 10분 이내, 핵심 항목과 수치만, 포장 없이.
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각 담당 부대표들의 보고가 끝났다.
구매 담당 부대표 윤태평이 외부 세미나 참석 중이라 차남현은 그를 부르지 않고 구매 부서장을 불러 보고를 시켰다.
부서장이 긴장한 얼굴로 어떻게든 마무리했다.
그리고 회의실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차남현이 보좌 직원에게 낮게 지시를 내렸다.
직원이 응하고 나갔다. 차남현이 돌아서며 말했다.
"오늘 기술 세미나가 있다고 했죠?"
"네, 지금 진행 중입니다. 여기서 영상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화면이 전환됐다. 세미나장 실시간 영상이 잡혔다.
마침 한 발표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었다.
"……이상으로 저희 원격 스마트 유지보수 설비의 성능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용하시면서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겠으며, 스마트 전력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남현이 무심하게 화면을 봤다.
그리고 굳었다.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전원이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봤다.
"세미나장 지금 바로 데려가요."
말을 끊고 돌아서며 문으로 향했다.
청운 테크 총무이사가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따라붙었다.
"대표님, 세미나장은 3층입니다.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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