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자 차남현이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성하진이 발을 멈췄다.
불이 꺼진 거실 한가운데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성하진은 잠시 멍하게 섰다.
오늘이 원래 성하진의 생일이었다.
기억 속에는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차남현이 뻣뻣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먼저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박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하진아, 남현한테 네 어머니 출장 중이라는 얘기 들었어.
혼자 지내는 것 같아서 아주머니가 조금 챙겨주고 싶었어. 생일 축하해."
차남현이 어색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박시온이 같이 불렀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날 때쯤, 성하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불을 껐다가 다시 불이 들어오자 성하진이 눈을 깜빡였다.
"……감사해요, 아주머니."
박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울 거 없어. 이 아이가 생일이라는 것도 아주머니가 먼저 챙겨줘야 알지."
차남현이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요."
성하진이 그걸 받아들고 봤다.
"한 송이에요? 진짜 짜네."
"마당에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성하진이 눈을 크게 떴다.
"마당에서 꺾은 거예요?"
차남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성하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조용하게, 진심을 담아.
두 생애를 합쳐 이렇게 마음이 담긴 생일은 처음이었다.
가장 수수한 생일이었지만, 가장 진심인 생일이었다.
자신은 임무 때문에 도왔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 아무런 계산 없이 이런 걸 준비한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차이가 속을 조용히 찔렀다.
케이크를 먹고 밥도 먹었다.
오래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성하진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남현이 주방을 정리하고 나왔다.
그때 박시온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코 아래쪽으로 붉은 것이 흘렀다.
차남현이 굳었다.
"어머니."
대답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
다음 날 오후, 차남현이 병원을 나섰다.
의사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출혈. 두개내 감염. 이차 개두 수술.
수술을 해도 예후가 좋지 않다. 하지 않으면 시간이 얼마 없다.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했다.
차남현에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포기는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병원을 나와 지하 권투장으로 향했다.
임성희 씨는 보이지 않았다. 등록을 마치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입구에서 누군가 막아섰다.
권투장에서 배팅 판을 여는 운 사장 밑에 있는 사람이었다.
돈 두 묶음을 차남현 앞에 떨어뜨렸다.
"오늘 밤 운 사장 지시대로 움직여. 끝나면 3백만 원 더 줘."
차남현의 시선이 그 돈 위로 내려갔다.
천천히, 그 돈을 내려다봤다.
성하진이 차남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안 건 밤 열 시였다.
시스템으로 확인하니 차남현이 지하 격투장 쪽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박시온 씨가 재출혈을 일으켰다는 것을.
시스템 대역폭이 자신의 안전 모니터링에 대부분 소모돼 있었다.
차남현 쪽을 따로 물어봤기 때문에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성하진은 잠시 멈췄다.
자기와 직접 상관없는 일이었다.
차남현이 어떻게 되든 그게 자신의 탓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도 이미 충분히 위험했다.
그런데 어제 초를 켜고 서툴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성하진이 낮게 욕을 한 마디 내뱉고, 스워트가 남겨두고 간 총을 챙겨 집을 나섰다.
---
지하 격투장 창고.
차남현의 두 손이 수갑으로 채워진 채 위에 매달려 있었다.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다. 눈썹 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시야를 막았다.
급히 돌아온 임성희가 어두운 얼굴로 차남현을 보다가 아버지에게 조용히 애원했다.
"아버지, 남현이 어머니 수술비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조 사장이 시가를 손에 들고 천천히 말했다.
"봐줘? 내가 봐주고 싶어도, 이 바닥에서 규칙이 제일이야.
이걸 무너뜨리면 아무것도 안 돼."
옆에서 덩치 큰 남자가 다시 채찍을 들어올리려 하자 임성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남현은 달라요. 저랑 사귀어요. 자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조 사장이 손을 멈추며 눈썹을 올렸다.
"차남현, 성희가 하는 말이 맞아?"
임성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남현, 어서 말해요."
차남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됐다. 눈이 부어 있었다. 그래도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임 선생님 호의는 감사한데요."
임성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상태에서도 거절하다니. 자존심 때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진짜 어이가 없었다.
억울하고 창피했다. 임성희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조 사장이 헛웃음을 냈다.
"뭐, 그래도 배짱은 있네. 좋아. 오늘 기회를 날린 건 네 몫이고,
전에 여기서 일한 것도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주지. 손가락 하나 남겨두마.
값은 쳐줄게. 500만 원에 오늘 승부조작 사례금 합쳐서."
조 사장이 손을 흔들었다.
한 남자가 칼을 들고 차남현 쪽으로 걸어갔다.
임성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조 사장님, 차남현 빼러 온 사람이 있는데요."
조 사장이 눈썹을 올렸다. 임성희도 멈칫했다.
매달려 있던 차남현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짐작이 가는 듯 눈빛이 달라졌다.
다음 순간 몇 명의 남자에게 이끌려 성하진이 들어왔다.
후드 집업을 입고 있었다. 체격은 다소 호리호리했다. 들어서면서 차남현을 봤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는 꼴을 보고 미간이 좁아졌다가, 이내 시선을 위에 앉아 있는 조 사장에게 옮겼다.
"인사드립니다. 차남현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사죄드리고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임성희가 성하진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무의식적으로 차남현을 봤다.
방금 전까지 어떻게 맞아도 표정 하나 안 바뀌던 차남현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신경 쓰고 있었다.
임성희는 표정 없이 소파에 다시 등을 기댔다.
조 사장이 피식 웃었다.
"어린 게 여기 와서 말을 하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있던 덩치가 발을 들어 성하진의 등을 세게 걷어찼다.
성하진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차남현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이를 악물고 낮게 외쳤다.
"건드리지 마!"
성하진이 욕을 한 마디 내뱉으며 일어났다.
몸을 돌리는 순간, 총을 뽑아 쐈다.
탕.
자신을 걷어찬 남자의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다.
비명소리가 터졌다. 남자가 나뒹굴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방 안이 얼어붙었다.
조 사장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디가드가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 앞을 막았다.
성하진은 숨 한 번 고르고 총구를 내렸다.
본래 성격이 순한 편은 아니었다. 사람 구하러 왔다는 목적만 없었으면 보충탄도 줬다.
총 솜씨는 원래의 이 몸이 물려준 것이었다. 레슬리가 직접 가르쳤다.
조 사장을 똑바로 봤다.
"먼저 손을 쓰신 분은 어느 쪽인지요."
조 사장의 눈이 좁아졌다.
총을 뽑는 속도, 쏘는 순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 이건 처음 총을 잡아본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어디서 굴러온 분이신지."
"사죄와 변상은 이미 말씀드렸어요. 모르셔도 됩니다."
성하진이 냉소했다.
"남의 물건 발로 걷어차고 돌려받으러 온 사람한테 이름 묻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조 사장이 일어났다 앉았다 하다가 결국 조용히 웃었다.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탐색하는 눈이었다.
"배짱이 있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성하진이 배낭에서 현금 묶음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아까 그 사람 다리는 제가 쐈고, 차남현이 규칙을 어긴 건 사실이에요.
둘 다 정리하는 거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조 사장이 한참 성하진을 바라봤다.
"친구 삼고 싶네."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성하진이 짧게 쳐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고요. 풀어주시면 나가겠습니다."
임성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끼어들었다.
"말 참 편하게 한다."
성하진이 임성희를 봤다.
"저도 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여기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잘 아시잖아요.
그 선 안에서 계시면 서로 불편할 일 없습니다."
임성희가 얼굴이 붉어지며 더 말하려 했다.
조 사장이 낮게 한마디로 막았다.
"그만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조 사장이 손을 들어올렸다.
누군가가 차남현을 내렸다.
성하진이 다가가 차남현을 부축했다.
차남현이 성하진을 내려다봤다. 눈빛이 깊었다.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가요. 할 말은 나가서."
성하진이 돌아서면서 조 사장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뒤를 노출한 채 출구로 걸어갔다.
작정하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뭔가를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임성희가 발을 구르며 말했다.
"아버지, 그냥 보낸 거예요?"
조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버틴 게 다 눈이 있어서야."
"그래도 어린 애 하나잖아요?"
"총 쏘는 눈이 그렇지 않던데."
조 사장이 무겁게 말을 잇지 않았다.
눈을 깜짝이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처음 쏘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눈이었다.
임성희가 말을 잃은 채 굳어 있었다.
---
근처 병원 응급실에서 상처를 처치했다.
겉에서 보면 심각해 보이지만 뼈는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병원을 나온 뒤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았다.
성하진이 길게 숨을 내쉬며 씩 웃었다.
"아, 식겁했다. 그래도 겁주는 데는 성공했네."
차남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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