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진이 성서우에게 모함을 당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성서우가 학교에 조퇴계를 내고 드라마 촬영에 들어갔다.
제작팀도 소문을 들었다. 외형은 성하진이 압도적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소문이 붙은 신인을 쓰기엔 부담이 따랐다. 결국 그게 성서우의 진짜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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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로런 박사가 국내 의료기관 시찰 일정으로 입국했다.
연결된 병원은 이 도시에 있었다.
성하진이 메시지를 보냈다.
[운명 개척자: 로런 박사님 오셨어요. 연락처 드릴까요?]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차남현: ……진짜예요?]
성하진은 짧게 답했다.
[운명 개척자: 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한참 뒤에 왔다.
짧았지만, 차남현이 보내는 메시지치고는 긴 쪽이었다.
성하진은 시스템 창을 열었다.
[차남현 흑화 수치: 60]
성하진은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시야 끝에 뭔가 걸렸다. 층계를 올라가는 뒷모습, 발걸음이 이상했다.
어깨가 안으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제1 실험동 9층이었다. 위로 올라가면 옥상밖에 없었다.
성하진은 한 박자 멈칫했다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험 도구를 챙기고 있던 담당 교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님, 방금 학생이 옥상 쪽으로 올라갔는데요. 분위기가 좀 이상했어요."
선생님이 눈살을 좁혔다. 잠깐이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보자."
잘못 판단했다 해도 확인은 해야 했다.
성하진도 뒤를 따랐다. 옥상 문을 열자마자 선생님의 얼굴이 굳었다.
난간 끝, 학생 한명이 서 있었다.
"야! 학생, 거기서 뭐 해!"
선생님이 손을 떨면서 핸드폰을 꺼내 보안실에 전화했다.
끊기 무섭게 경찰에도 신고했다.
학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하얗고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선생님이 한 발 다가가려다 멈췄다.
학생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굳어버렸다.
"다들 나한테 사는 길을 안 줘요……. 나 이제 못 살겠어요……!"
"그냥 잘못 한 번 했는데 왜 이렇게 끝까지 가는 거예요……!"
선생님이 울음을 참으며 목소리를 달랬다. 그사이 발소리가 들렸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들은 학생들이 따라 올라온 것이었다.
성하진은 그 순간 시스템에 물었다.
*이 아이, 무슨 일이에요.*
[불법 사채입니다. 80만 원을 빌렸다가 이자가 불어 1000만 원이 됐어요.
채권자들이 하반신 노출 사진을 학교 단톡방에 유포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이미 소문이 돌고 있었어요.]
성하진은 그제야 아침부터 뭔가 술렁이던 분위기가 이해됐다.
학생이 난간 위로 발을 올리려는 것이 보였다.
성하진이 소리쳤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학생이 멈췄다.
"나 돈 있어. 내가 대신 갚아줄게."
학생이 피식 웃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네가 누군지 알아. 허세 부린다는 애잖아. 없는 척하다가 들통 난 거잖아."
성하진은 핸드폰을 꺼냈다.
"안 믿기면 계좌번호 불러. 지금 바로 보내줄게. 해보는 데 뭘 잃어, 일단 해봐.
그리고 네가 없어지면 부모님은 어떡해.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뒤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함께 소리를 높였다.
몇몇은 울면서 이름을 부르며 내려오라고 했다.
학생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려 겁이 났던 것이었다.
손을 떨면서 계좌번호를 불렀다.
성하진이 바로 이체했다.
학생의 핸드폰이 울렸다. 입금 알림을 본 순간 눈이 크게 벌어졌다.
1000만 원. 진짜였다.
성하진이 천천히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해결됐어. 내려와. 거기 위험해."
선생님도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래, 이제 다 됐어. 내려와라, 응?"
학생은 난간을 잡은 손을 서서히 풀었다.
발을 안쪽으로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발이 미끄러졌다.
낡은 난간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기울었다.
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쏠렸다.
성하진이 몸을 던졌다.
두 손으로 발목을 잡아챘다. 엄청난 무게가 팔을 잡아당겼다.
성하진의 몸이 난간에 쾅 부딪혔다. 팔이 금속에 쓸리며 피가 흘렀다.
뒤에서 비명이 터졌다.
선생님이 반사적으로 성하진의 다리를 껴안았다.
함께 올라온 남학생 몇 명이 난간 쪽으로 달려들었다.
고태윤이 가장 먼저였다.
몸을 기울여 학생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러다 옆을 봤다.
성하진이 팔 두 개로 아이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양쪽 팔이 다 긁혀서 피가 흘렀다.
몸이 절반 가까이 난간 바깥으로 쏠린 채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쥔 채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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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구조된 학생은 곧바로 응급차로 실려 갔다.
현장에 있던 선생님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못 했다.
성하진 곁에 남은 담당 선생님은 안도감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진아, 오늘 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다 성하진의 팔을 보고 눈이 커졌다.
"너 다쳤잖아! 왜 말을 안 했어?"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어서 와, 당장 보건실부터 가자."
보건실. 그 말을 듣자 성하진의 머릿속에 그 남자의 얼굴이 스쳤다. 상혁.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 가겠다고 하려는데, 선생님이 이미 팔목을 꽉 잡고 이끌고 있었다.
억지로 끌려 들어간 보건실에서 상혁은 막 진료를 마친 참이었다.
청진기를 집어넣으며 돌아서다가 성하진과 마주쳤다.
흰 가운, 금테 안경,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처음 봤을 때와는 완벽하게 달랐다. 그때의 그 살기 어린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성하진은 오히려 더 등골이 서늘했다.
저렇게 완벽한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이라는 건, 어느 쪽이 진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니까.
"선생님, 이 학생이 사람 구하다가 다쳤어요. 저는 사고 학생 가족한테 연락해야 해서요. 잘 부탁드립니다."
성하진이 미처 잡을 새도 없이, 교사는 다급하게 상황만 던져놓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디 다쳤어요, 학생?"
상혁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오늘 처음 보는 평범한 학생을 대하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성하진도 최대한 무감각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말없이 교복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팔뚝이 드러났다. 난간에 긁힌 상처가 길게 파여 있었다. 핏자국이 선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 없이 서늘한 얼굴로 소독 트레이를 당겨왔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처리를 시작했다.
보건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자 욱신거렸다.
성하진은 입술이 터지도록 꽉 깨물고 몸을 굳혔다.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으려 버텼다.
상혁이 눈을 살짝 들어 버티는 성하진을 무심하게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내리고 거즈를 덮었다.
처리가 끝나고 나서, 상혁이 피 묻은 트레이를 밀어놓으며 건조하게 말했다.
"며칠은 물 닿지 않게 하고, 자극적인 활동은 피해요."
"감사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성하진이 쫓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많이 무서워요, 나?"
성하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닙니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억지로 딱딱한 대답을 뱉어냈다.
상혁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캐비닛에 등을 나른하게 기댔다. 당장 더 붙잡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성하진은 짧게 인사를 남기고 보건실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숨 막히는 복도를 벗어났다.
등 뒤에서 상혁이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오늘 그 녀석의 행동은 솔직히 좀 의외였다.
보건실로 끌려오기 전부터, 학교 옥상에서 무슨 난리가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얄팍한 아이가 생판 남을 구하려 제 몸을 던졌다는 것도.
아르트 가문의 인간들은 대개 냉정하고 타인에게 거리를 뒀다.
남의 일에 이문도 없이 몸을 사리지 않고 던지는 쪽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살이 찢어지는 상처를 치료할 때 파들파들 떨면서도 독기 품고 신음 하나 안 낸 것도.
자신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뻣뻣하게 버티는 것도.
상혁이 받아본 정보 속 아르트 공자는 오만방자하고 잔인한 소년이었다.
레슬리가 싸고돌아 안하무인으로 자라난 구제 불능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제 손아귀를 벗어난 저 작은 짐승은.
상혁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펴며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둘 다인가. 아니면, 정보가 아예 틀린 건가.
*……흥미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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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집에 돌아오자, 붕대를 감은 팔을 본 성희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굳어버렸다.
사람을 구하다 다쳤다는 담임 교사의 연락을 듣고 나서야 표정이 간신히 풀렸다.
성희수는 책망의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다가와 성하진을 안고 이마에 따뜻하게 입을 맞췄다.
"우리 하진이……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엄마 진짜 자랑스러워."
잔소리도 없었다.
그저 다음번엔 남을 돕더라도 네 몸도 같이 챙겨야 한다고, 조용하게 타일렀을 뿐이었다.
성하진은 그 온기를 받으며, 굳게 얼어있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녹는 걸 느꼈다.
그의 삶에서 이런 방식의 무조건적인 애정은 너무나 낯설었다.
화내지 않고 오롯이 걱정해 주는 것, 윽박지르지 않고 존중하면서 챙겨주는 것.
너무 낯설었지만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목이 멜 만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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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었다.
성하진은 도의적인 예의상 시내 병원 입원실에 잠시 들렀다.
어제 옥상에서 구조해 낸 학생, 조시우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다만 벽에 머리를 몇 번 부딪히고 충격을 받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부모가 걱정되어 며칠 입원시키며 경과를 보기로 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있던 조시우가 상체를 튕기듯 일으켰다.
"아빠, 엄마! 이 형이야! 어제 옥상에서 구해준 형……!"
양쪽 의자에 앉아 있던 부모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히 어머니가 눈물을 쏟으며 달려와 성하진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시우 퇴원하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와주시다니요."
"우리 아들 살려주신 이 큰 은혜는 평생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성하진은 쏟아지는 감사가 어쩔 줄 몰라 어색하게 고개만 숙였다.
부모가 어제 성하진이 보내준 천만 원을 다시 건넸다.
한사코 사양했지만 받지 않으면 억장이 무너진다며 억지로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수납하러, 어머니는 밥을 사러 병실을 비웠다.
병실에는 성하진과 침대에 앉은 조시우, 그리고 문병을 와있던 또래 남학생 몇 명만 남게 되었다.
가만 보니 그 남학생들은 학교에서 성하진과 한때 어울리던 가식적인 무리였다.
알고 보니 조시우와는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사이라 문병을 온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뒤늦게 성하진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굳어 있는데, 조시우가 먼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선언할게. 하진이 형은 이제 내 의리 형이야. 앞으로 학교에서 이 형 욕하면, 나 가만 안 있어."
쭈뼛거리던 학생들이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태세를 전환하며 반응했다.
"아, 당연하지! 자기 팔 다치면서 남 목숨 구해준 사람인데 우리도 진짜 인정해."
"맞아, 금수저 척 좀 한 거 그게 뭐 대수냐? 이렇게 의리 있는 놈이면 진짜 우리 편이지."
"그니까, 앞으로 진짜 잘 지내보자고."
조시우가 피식 웃더니, 시선을 쓱 돌려 성하진에게 물었다.
"근데 형, 솔직히 너네 진짜 그렇게 가난해? 빚 갚아준 천만 원, 그거 어떻게 쏜 거야?"
순간 시끄럽던 남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일제히 성하진의 대답만 기다리며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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