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BL] 악역인데 빌런들에게 찍혔다. 10화

울다미 2026. 5. 7. 12:37

연주가 끝났다.
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가, 김 교사가 붉어진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됐어, 하진이 네가 무대 서. 선생님 잘 봤어. 진짜 완벽했어."

성하진이 건조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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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당일이 됐다.

가식적인 무리 아이들이 평소처럼 단물이나 빼먹을 요량으로 성하진한테 같이 자리 잡으러 가자고 불렀다가, 
성하진이 메인 무대에 선다는 걸 그제야 알고 뒤집어졌다. 

조시우와 나머지 녀석들이 부랴부랴 대기실로 쳐들어왔다.
성하진이 샴페인 골드빛의 핏이 떨어지는 정장 수트를 입고 있었다. 

평소 이마를 덮던 이국적인 옅은 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반쯤 뒤로 넘겨 선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녀석들이 그 서늘하고 압도적인 외형에 압도되어 일제히 굳어버렸다.

"……야 잠깐, 솔직히 성서우가 학교 꽃이라는 거 이제 좀 존나 웃기지 않냐?"

"인정. 하진이 형 이 얼굴로 무대 올라가면 성서우 빈자리 같은 건 싹 다 묻힌다, 진짜로."

조시우가 호들갑을 떨며 성하진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하진이 형, 근데 이거 얼굴로 승부 보는 거 아니고 진짜 실력 뽀록나는 무대잖아. 
형 설마 금수저 예술가 코스프레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니야? 올라가서 진짜 칠 수 있어?"

성하진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할 수 있어. 시끄러우니까 그만하고 나가."

조시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너스레를 떨었다.

"믿어, 형만 믿어! 무대 찢어라!"

무리가 왁자지껄하게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실 밖 복도에서 고태윤 일행과 마주쳤다. 
고태윤은 이날 축제 1부 사회를 맡은 터라 한껏 꾸민 상태였다.

사회를 함께 보는 여자애들과 재즈댄스팀 무리 몇 명이 고태윤 곁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야, 성서우 선배 대타로 성하진이 피아노 친다고? 쟤는 진짜 성서우 선배 거라면 꾸역꾸역 다 뺏으려 드나 봐. 소름 돋아."

"성서우 선배 수준을 모르는 거지. 쟤 피아노 치는 거 본 사람 있어? 이거 빼박 망신 자초하는 거 아냐?"

"그러게. 무대에서 쪽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네……."

고태윤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무리의 노골적인 조롱에 맞장구를 치지도, 멈추게 제지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맞은편 코너에서 수트 차림의 성하진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뒷담화가 똑똑히 들린 게 분명한 거리였다. 아이들 표정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성하진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투명 인간 취급하듯 무심하게 지나쳤다. 
억지로 의식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진짜 그깟 버러지들한테 굳이 에너지를 쓸 가치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지나치기 직전, 성하진이 걸음을 멈추더니 재즈댄스팀 무리를 한 번 서늘하게 훑어내렸다.

"너, 춤춘다는 애. 쌍꺼풀 테이프 눈썹까지 다림질하듯 올라갔어. 핀 조명 받으면 번들거려서 귀신처럼 보일 텐데."

비웃던 댄스부 여학생이 경악하며 두 눈을 끔벅였다.

"옆에 너는…… 그 짧은 치마, 골반 튕기다가 지퍼 터져서 무대 위에서 스트립쇼 하기 싫으면 핀이라도 꽂고 올라가."

그 여학생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성하진이 마지막으로 고태윤 옆에 선 사회자 여학생을 무심히 응시했다.

"그리고 너, 파운데이션 톤을 그렇게 귀신같이 올리면 조명 아래에서 달걀 귀신처럼 동동 떠. 
우리 학교 축제가 무슨 공포 체험관 홍보하는 자리는 아니잖아."

건조한 어투로 숨도 안 쉬고 팩트를 꽂아 넣은 성하진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뒤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하고 오만한 걸음걸이였다.

등 뒤에 남겨진 무리 중 누구도 한동안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던 고태윤이 멈칫하다가 무심결에 픽, 실소를 터뜨렸다. 
하마터면 미친놈처럼 소리 내어 크게 웃을 뻔했다.

성하진이 뱉은 독설에 틀린 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방금 자기도 속으로 저 세 사람의 과한 세팅을 보며 딱 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그 독설을 내뱉은 성하진 본인은, 
가벼운 베이스에 샴페인 골드빛 수트를 입고 저렇게 걸어가면서도 딱히 치장한 티가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 옷을 입고 태어난 사람처럼 기품이 넘치고 자연스러웠다.
고태윤은 멀어지는 성하진의 곧은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며 복잡하게 생각했다.

*내가 여태 저 자식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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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오르고, 2부 절반쯤 지났을 때 성하진의 독주 차례가 됐다.
사회자의 짧은 소개가 끝나자 무대 전체가 암전됐다. 

다시 핀 조명이 켜졌을 때, 쏟아지는 빛줄기는 오직 무대 중앙의 그랜드 피아노 위로 모였다.

피아노 앞에 누군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관객석을 등지고 날렵한 턱선과 콧대만 보이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무심하게 첫 건반을 눌렀다.

천공의 성 라퓨타.

건반의 무게가 실린 소리가 흘렀다.
방금 전까지 아이돌 축하 무대 보듯 들끓던 짐승 같은 공간이 순식간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무도 헛기침조차 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선율이 폐부 깊숙이 스미는 것처럼, 수백 명의 관객이 그 소리 안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무대 옆 짙은 어둠 속 어딘가에 고태윤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얼마 전 옥상에서 두 팔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사생결단으로 아이의 손을 놓지 않던 그 처절한 모습이 한동안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었다. 

그 미친 사건이 있은 후로, 
성하진이라는 인간을 담는 자신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불쾌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축제 메인 무대에 굳이 성서우 대타로 나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솔직히 코웃음 치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적당히 망신이나 당하지 않고 무난하게 내려오면 다행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무대 위 조명을 받는 서늘한 옆모습. 살짝 허공을 향해 치켜든 턱의 각도. 
피아노와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폭발적으로 쏟아내는 기교와 자세.

고태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가 알던 그 징그럽게 쫓아다니던 성하진이 맞나, 전혀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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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맨 끝자락,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구석에 차남현이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 병원 수속을 밟고 오느라 늦어서 안쪽으로 들어갈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냥 어둠 속에 조용히 묻혀 서 있었다.
처음 선율이 귓가에 닿았을 때,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조금 전 병원 복도에서 들었던 의사의 절망적인 말이 머릿속을 독하게 맴돌았다. 
잡혀버린 수술 날짜. 기하급수적인 수술비. 그리고 지금, 거짓말처럼 제 통장에 꽂혀 있는 4천만 원.

그 악랄했던 새끼의 돈을 진짜로 쓰는 게 맞는 건지, 
성하진의 그 덤덤했던 눈빛을 한 번쯤은 믿어보는 게 맞는 건지, 아직도 머릿속이 지옥처럼 복잡했다.
그러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피아노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어두운 강당 천장,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해 그 숨 막히는 선율이 발버둥 치듯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시궁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투성이 무언가가 억지로 날개를 달고 찢어지며 위로 비상하는 것처럼. 
어두운 밤하늘이 있고, 그 별들 사이에 위태로운 성이 떠 있고, 차가운 달빛이 그 모든 걸 서글프게 덮어주는 듯한 감각.

차남현은 홀린 듯 무대 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득하게 먼 거리였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그 녀석의 실루엣과 옆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살짝 위를 향해 고개가 처연하게 기울어진 각도.

*저 악질적인 새끼도…… 속으로는 저렇게 처절하게 울고 있는 건가.*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남을 짓밟고 제멋대로 자란 새끼라, 
저따위 놈한테 마음 아프고 결핍된 구석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확신했는데.

차남현은 짐승 같은 제 안에서 그런 동정 어린 비약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역겨우면서도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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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던 공연이 끝나자, 성하진이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짧게 목례를 했다. 
수백 명이 숨죽이던 객석에서 폭발적인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미친 듯한 휘파람 소리도 곳곳에서 섞여 터졌다.

맨 앞줄의 조시우와 그 찌질한 무리 녀석들이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시피 하며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그 꼴을 무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솔직히 좀 우스웠지만, 그게 또 그 녀석들 나름의 진심이라는 게 투명하게 보였다.

성하진은 환호성을 뒤로 한 채 무대 뒤편 계단을 내려와 텅 빈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축제가 피날레로 접어들어 다들 운동장으로 빠져나가는 시점이라, 무대 뒤 복도는 쥐 죽은 듯 한산했다. 

탈의실 문 앞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어둠 속에서 느릿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상혁이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나른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늘 입던 숨 막히는 흰 가운이 아니라 블랙 계열의 캐주얼한 사복 차림이었다. 
평소의 그 살벌한 분위기보다 훨씬 가볍고 젊어 보였다.

우성 알파 특유의, 딱히 힘을 빡 주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존재 자체가 주변 산소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성하진은 본능적으로 그 위험한 기운을 의식하면서도 철저하게 내색하지 않았다.

"대타치고는 곡 제법 잘 치던데요."

상혁이 한쪽 입꼬리를 매력적으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성하진이 건조하게 끊어내고 당장 돌아서려는데 상혁의 끈적한 목소리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대타 구원 등판이라는 뒷소문을 들었는데. 사촌 형이 드라마 씬 찍으러 핑계 대고 빠진 거라면서요?"

상혁의 어조가 묘하게 흥미롭다는 듯 장난기를 짙게 머금었다.

"얼마 전 계단 입구에서 바닥에 나뒹굴며 고육지책으로 피해자 코스프레 하던 그 천사표 사촌 형?"

성하진이 순간 경계하듯 눈을 살짝 좁혔다.

"……그걸 봤습니까?"

상혁이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 살짝 흔들어 보였다.

"흥미로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을 뿐만 아니라, 화질 좋게 잘 찍어뒀는데. 
이 엿 같은 영상, 익명 게시판에 시원하게 공개해 줄까요?"

성하진은 눈앞의 이 속을 알 수 없는 맹수를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혁이 재미있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반응이 왜 이래.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심심하네."

"그걸 빌미로 저한테 뭘 원하는 겁니까?"

"딱히? 그냥 불쌍해서 도와주려고요. 통쾌하게 영상 까발려주는 대가로, 나중에 내 소박한 조건 하나만 군말 없이 들어줘요. 
뭘 부탁할지는 나도 아직 구상 중이라, 일단 빚으로 달아두고 기회만 남겨두는 걸로 하죠."

다음 순간, 성하진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얼음장같이 말했다.

"됐습니다. 사양할게요."

상혁이 예상외의 거절에 눈썹을 흥미롭게 튕겨 올렸다.

"네?"

"남들이 속도 모르고 저를 어떻게 쓰레기 취급하든, 솔직히 이제 크게 신경 안 씁니다. 
그깟 얄팍한 평판 좀 바꾸겠다고,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알 수도 없는 빚을 지고 대가를 치르는 건 제 취향에 더 안 맞고요."

상혁이 멍한 얼굴로 잠시 성하진을 응시하다가,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긴 손가락으로 제 미간을 짚으며 낮게 읊조렸다.

"와…… 생각보다 훨씬 독하고 영리하네."

성하진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을 한 번 건조하게 굴리고 완전히 돌아섰다.

"더 볼일 없으시면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혁이 더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고 탈의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 남겨진 상혁이 그 오만하고 꼿꼿한 뒷모습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바닥에서 자기한테 어떻게든 한 번 엮여보려고 달려들거나, 
눈에 불을 켜고 아양 떨 기회를 노리는 속물 타입이 트럭 단위였는데. 
저렇게 징그러운 것 보듯 기를 쓰고 피해 달아나는 종자는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

*저 독종, 그 학교 킹카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를 목매달고 쫓아다닌다고 했지.*

아직 핏덩이라 눈이 낮아도 한참 낮다. 제대로 된 취향 개발이 시급하다.
상혁은 벽에서 등을 떼며 헛웃음과 함께 혼자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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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축제가 예상 밖의 엄청난 반응으로 성황리에 끝날 무렵, 
촬영장 대기실에 있던 성서우는 이미 며칠 전부터 성하진이 자신의 펑크 난 자리에 대타로 무대에 선다는 찌라시를 전해 듣고 알고 있었다.

별로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오히려 그 사실을 낄낄대며 조롱하는 추종자 무리 단톡방을 눈팅하며 속으로 승리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건반 근처에도 못 가본 그 등신 같은 실력이 자기 수준을 따라올 리가 없지.* 

수백 명 앞에서 삑사리나 내고 실컷 조롱거리로 전락하면 그걸로 완벽했다.

그런데 피아노 독주 무대가 끝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미친 듯이 알림이 울려야 할 단톡방이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다.

평소라면 가장 먼저 사진을 찍어 올리며 성하진을 비웃기 바빴을 녀석들이 단체로 입을 다문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기분이 묘하게 더러웠다.

다음 날 오후, 기어코 학교 익명 게시판에 축제 메인 무대 하이라이트 영상이 대문짝만하게 올라왔다. 

성서우는 마침 메이크업을 수정하며 촬영 대기 중이었다. 베스트 글로 올라온 링크를 발견하고 별 기대 없이 비웃음을 장전하며 눌렀다.
바로 옆 의자에 앉아 대본을 보던 조연 여배우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어머 서우 씨, 재밌는 거 봐요? 그게 뭐예요?"

성서우는 카메라 앞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나불댔다.

"아, 제가 이번에 중요한 촬영 때문에 부득이하게 학교 축제 메인 무대를 펑크 냈거든요. 
선생님이 너무 급해서 실력도 없는 제 사촌 동생을 억지로 대타로 세우셨다고 해서요. 
그 애가 제 빈자리 채우느라 얼마나 무대에서 망신당했을지 마음이 계속 쓰여서……."

주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에이, 아무리 핏줄이라도 어떻게 그 완벽한 서우 씨 대신을 해요. 그 동생 불쌍하네." 하고 서둘러 아부를 거들었다.

성서우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동영상 진도 바를 뒤쪽으로 휙 넘겼다. 피아노 독주 순서를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명이 암전됐다가 다시 켜지는 흔들리는 폰카 화면. 핀 스포트라이트가 피아노 위에 날카롭게 쏟아졌다. 

피아노 앞의 매끄럽고 서늘한 옆모습.
건반을 내리치는 묵직한 선율이 흘렀다.

처음엔 화면을 같이 보던 조연 배우 하나가 "쯧, 역시 폼만 잡았지 딱 봐도 아마추어네. 서우 씨 발끝이나 따라가겠어요?" 하고 알랑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곡이 10초, 20초 이어지자 그 아부성 멘트가 뚝 끊겼다.

클로즈업된 화면 속 성하진의 미친 몰입도가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피아노 소리를 넋을 잃고 들으면서, 핸드폰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 경악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서우는 핸드폰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걸 느꼈다.
왜 어제 단톡방 녀석들이 귀신같이 조용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주변에서 알랑거리던 배우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잃었다. 
성서우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들이 묘하게 당혹스럽고 복잡했다. 

*대타로 선 사촌 동생이 망신을 당해? 네가 걱정해야 할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쟤가 널 묻어버린 거 같은데?* 
하는 노골적인 시선들이었다.

성서우는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숨기며 확 핸드폰 화면을 끄고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다. 좆밥 같은 작은 고등학교 축제 한 번 눈요깃거리일 뿐이다. 
자기는 지금 프로들의 상업 드라마 촬영 현장에 있다. 

이 굵직한 작품이 빵 뜨면 자신은 단숨에 전국구 스타가 된다. 
성하진 그깟 놈이 우물 안 학교에서 피아노 한 번 뚱땅거려 주목받는다고 해서 대세가 달라지는 건 절대 없다.

그렇게 처절하게 정신 승리를 하며 마음을 다잡는데,
하필, 좆같게도 마침 오늘 저녁에 자기가 찍어야 하는 하이라이트 감정 씬이 피아노 치는 장면이었다.

스탠바이가 떨어지고, 성서우는 카메라 앞에 세팅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여러 대의 카메라 앵글이 맞춰졌다. 
눈부신 조명도 일제히 켜졌다.

큐 사인과 함께, 떨리는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그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 방금 액정으로 봤던 그 빌어먹을 영상의 한 장면이 악몽처럼 덮쳐왔다. 
조명 아래, 완벽하게 음악과 하나가 되어 압도하던 성하진의 서늘한 측면이.

*……씨발.*

건반을 내리친 성서우의 땀 찬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끔찍한 불협화음이 촬영장을 찢었다. 
완벽하게 음이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