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어. 아이폰이든 한정판이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 진짜 너무 유치하고 허영심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잠깐 침묵이 내려앉더니 남학생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별다를 게 없지.
너 금수저라는 거 부러워하면서 우리도 있는 척하고, 솔직히 그게 딱히 기분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다른 애가 성하진을 봤다.
"하진아, 너도 그런 기분이었지?"
성하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렇지."
---
조시우를 문병하고 나서 병원을 나설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다가 옆 비상계단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런 박사님이 국내에 오신 게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서요.
만약 이번 경우가 특별 전담 케이스였다면 수술 비용은 지금의 몇 배가……."
그다음, 며칠 밤을 새운 듯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차남현이었다.
"다 계산했을 때 총 얼마 정도 필요합니까?"
"최대한 건강보험 적용 약제로 맞춰도 3천만 원 정도는 나올 것 같아요.
이게 저희가 낼 수 있는 최저 예산입니다."
비상계단 쪽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으면서 먼저 나왔다.
성하진은 그 자리에 서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로런 박사를 부른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정작 차남현에게는 그 빌어먹을 수술비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비상계단 안쪽에서 들린 건, 차남현이 부동산 중개인과 다급하게 통화하는 소리였다.
당장 집을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일 현금으로 급매를 내놓느라 시세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 불렸다.
그마저도 수술비에 못 미칠 수 있었고,
설령 영혼을 팔아 그걸 채운다 해도 수술 이후의 무자비한 치료비와 간호 비용은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비상계단 안쪽에서 주먹으로 시멘트 벽을 둔탁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성하진의 발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묵직한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차남현이 걸어 나왔다.
눈가가 핏발이 서 붉었다. 표정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성하진을 발견하고 걸음을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려 했다.
"내가 도울 수 있어요."
성하진이 낮고 명료하게 말했다.
차남현이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보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평평했다.
"뭘."
성하진은 그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연히 들었어요. 어머니 수술비가 부족하면, 내가 도울 수 있어요."
차남현이 성하진을 봤다.
"이번엔 또 내 목줄 쥐고 뭘 시키려고."
표면은 죽은 듯 잠잠했다.
하지만 그 무감각한 눈동자 안쪽 어딘가가 처절하게 찢겨 나가고 있다는 걸, 성하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하진은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말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예전에 내가 너한테 쓰레기같이 군 거, 인정해요.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에서까지 그딴 식으로 함부로 굴 생각은 없어요."
차남현은 턱을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빌려줄게요. 당장 필요한 게 3천에서 4천만 원 정도면 가능해요.
급하게 갚으라고 독촉 안 해요. 네가 여유 생겼을 때, 그때 얘기해요."
차남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 지껄이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알아."
성하진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기회 놓치면 너 평생 후회할 거잖아. 그 꼴값 떨며 집 팔아넘기면 나중에 퇴원하신 어머니는 어디로 모실 건데.
어머니 회복하시고 나서 네가 짊어질 짐이 배로 커질 수 있어."
차남현은 한동안 짐승처럼 날 선 눈으로 성하진을 노려보았다.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원래의 성하진이 그동안 어떤 악랄한 방식으로 자신을 조롱하고 이용해 왔는지 뼛속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상태가 더 이상 자존심 따위로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기적처럼 로런 박사가 국내에 있는 지금 당장이 아니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영영 알 수 없었다.
침을 뱉고 거절할 수 있었다. 오기로 버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떡할 건가.
차남현이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차용증 써."
성하진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체했다.
4천만 원.
차남현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입금 알림을 확인하는 차남현의 굵은 손마디가 미세하게 떨렸다.
성하진이 건조하게 말했다.
"수술 이후에도 돈 깨질 일 많을 테니까 일단 넉넉하게 보냈어.
더 필요하면 말해. 되는 선에서 도울 테니까."
차남현은 잠시 넋을 잃은 듯 말이 없었다.
"……고맙다."
바닥을 긁는 듯 쇳소리가 섞인 한마디였다.
성하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련 없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병원 정문을 완전히 나서고 나서야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남현이 속으로 무슨 의심을 하든 상관없었다.
이번 한 번이 진심으로 닿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했다.
---
그날 밤, 레슬리에게서 직통 전화가 왔다.
그 특유의 묵직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아들의 일상을 묻는 동안, 시야 한구석에 시스템 창이 붉은 알림을 띄웠다.
[레슬리 아르트 관련 핵심 이벤트 정보: 3일 후 발렌사 가문 주최 연회에서 독이 든 샴페인을 마시게 됨.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치명적인 상태에 이름.]
성하진의 손이 핸드폰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아르트 가문은 거대했다. 그 이면에 도사린 내부 권력 다툼과 암투도 그만큼 더럽고 복잡했다.
레슬리가 쓰러지면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그 빈틈을 미친 듯이 파고들 거였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원작에서 거물 레슬리가 맞이한 비참한 끝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레슬리가 대답 없는 아들에게 낮게 다시 묻고 있었다.
성하진은 억지로 침을 삼키며 대답을 한 박자 늦췄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돌렸다.
"아빠. 나 방금 꿈 꿨어. 아주 기분 더러운 꿈."
"무슨 꿈인데 내 아들 목소리가 그래."
"아빠가 3일 후에 연회에 가는 꿈이었어. 발렌사 가문인가 뭔가 하는 곳.
아빠가 파란색 예복을 입고 있었고…… 내가 선물한 보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거기에 시커먼 피가 튀어 있었어. 아빠가 잔에서 뭔가를 마시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어."
성하진은 연기를 섞어 일부러 목소리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단순한 개꿈 치고는 너무 소름 끼치게 선명해. 찝찝하니까 아빠, 그 연회 절대 가지 마."
전화 너머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레슬리는 3일 후 발렌사 가문의 비공개 연회에 VVIP로 초청받은 상태였다.
멀리 떨어진 아들이 그 스케줄을, 심지어 입고 갈 예복의 색깔까지 정확히 '꿈'으로 봤다고 한다.
그 순간 레슬리의 서재 문이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열렸다.
최측근 비서가 곱게 다려진 예복을 조심스레 들고 들어왔다.
"보스, 사흘 뒤 발렌사 연회 복장 세팅 끝났습니다. 이안 도련님이 예전에 선물하신 보타이와 매치해 보시라고……."
레슬리의 싸늘한 푸른 눈이 비서의 손 위에서 멈췄다.
맞춤 제작된 짙은 파란색 예복이었다.
"……."
전화기 너머에서 성하진이 계속 다그치듯 말하고 있었다.
연회에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정 가야겠으면 남이 주는 술은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레슬리는 금세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그저 나쁜 꿈일 뿐이라고. 우리 아들 걱정하지 말라고.
성하진이 굽히지 않고 고집을 피우자, 결국 알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전화를 끊었다.
비서의 손에 들린 보타이까지.
거대한 서재 안이 무덤처럼 조용해졌다.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 서늘하고 짙은 녹색 눈동자.
레슬리 아르트는 걸려 있는 예복을 바라보며 한동안 뱀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눈빛만은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목을 칠 듯 차갑고 잔인하게 식어갔다.
---
통화를 마친 성하진은 조용히 안도했다.
아버지가 그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독만 마시지 않으면 됐다. 그것만으로도 닥쳐올 파멸의 시간을 한참은 뒤로 미룰 수 있을 터였다.
---
그날 아침, 1교시가 끝나자마자 담임이 성하진을 학생지도부 사무실로 호출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시우의 부모님이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성하진을 보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러 일부러 학교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교무부장의 표정은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묘하게 복잡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동급생을 쥐고 흔든다며 삿대질하던 놈이,
며칠 사이에 제 목숨을 던져가며 친구를 구한 학교의 자랑스러운 모범 학생이 돼 있었다.
이전의 억지스러운 징계 건을 다시 입에 올릴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눈치 빠른 교무부장도 그쯤은 계산하고 있었다.
성하진은 조시우의 담임과 교무실의 여러 교사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 낯간지러운 칭찬 세례를 받아야 했다.
어쩔 줄 몰라 억지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다 보니 교복 셔츠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겨우 그 숨 막히는 공간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서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
오후 종례 시간 직전, 담임 김 교사가 성하진을 조용히 따로 불렀다.
"하진아, 다름이 아니라…… 네 입학 서류 보니까 피아노랑 바이올린 수준급이라고 적혀 있던데, 맞지?"
성하진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교사가 그제야 앓던 이를 뺀 듯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다음주에 학교 가을 축제 있잖아. 메인 프로그램 중에 피아노 독주가 있거든.
원래는 네 사촌 형인 성서우가 메인으로 서기로 했는데, 걔가 지금 촬영 핑계로 장기 결석 중이라……
무대 자리를 통으로 비워둘 수가 없어서 그래. 네가 대타 좀 뛰어줄 수 있을까?"
성하진은 순간 미간을 굳혔다.
성서우는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서 학교 행사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새끼.
문제는, 성하진 본인이 피아노 건반을 직접 두드려본 기억이 없다는 거였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기억은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몸으로 체화된 감각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막상 무대 위에서 건반에 손을 올렸을 때 근육이 제대로 움직여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우선 한 번 쳐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들어보시고 무대에 세울지 결정해 주세요."
김 교사는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성서우가 펑크낸 마당에 대안 따위는 없었다.
---
방과 후, 김 교사가 텅 빈 음악실 문을 열었다.
스위치를 켜자 그랜드 피아노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차갑고 단정한 검은 광택이 흘렀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쳐봐."
성하진은 묵묵히 걸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익숙했다.
이 몸 깊은 곳 어딘가에 새겨져 있던 근육의 기억이 손끝에서 저릿하게 깨어났다.
성하진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움직였다.
묵직한 첫 음이 울려 퍼졌다.
예전에 좋아하던 곡이었다. 전생의 기억에서, 아니 이 남의 몸에 깃들기 전 시궁창 같았던 삶의 기억에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부잣집 아이를 창문 너머로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레슨비도, 그 비싼 악기를 살 돈도 없었으니까.
자신은 철저하게 '가질 수 없는' 쪽이었으니까.
건반에 닿을 일도 없었고, 함부로 닿아서도 안 됐다.
괜히 건드렸다가 흠집이라도 내면 물어낼 돈이 없다고, 그렇게 억눌리며 살았었다.
그 지긋지긋한 결핍의 감각이 지금도 뼛속 어딘가에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운 게 아니라, 그저 벗어나고 싶었던 처절한 흔적으로.
성하진은 자신이 곡에 몰입한 줄도 몰랐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날렵하게 움직이고, 폭발적인 음이 흘러넘쳤다.
격정적인 선율이 텅 빈 음악실을 꽉 채우며 번져나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김 교사의 숨소리가 어느새 멎어 있었다.
처음엔 대타치고는 제법 친다며 건성으로 듣던 표정이었다가, 곡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경악으로 굳어졌다.
압도적인 기교와 그 안에 담긴 서늘한 감정에 압도당해,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음악실에서 멀지 않은 보건실.
상혁은 블라인드가 내려진 어두운 창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두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은 암호화된 코드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불법 다크웹 창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상혁의 긴 손가락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다가, 뚝 멈췄다.
나른한 눈빛이 모니터에서 벗어나 허공을 향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미친 듯한 피아노 선율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단순한 학생 수준의 연주가 아니었다.
건반을 박살 낼 듯 내리꽂히다가도, 순식간에 베일 듯 날카롭고 서늘하게 감정을 쥐고 흔드는 소리였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조용히 상혁의 깊고 어두운 신경줄 어딘가를 예리하게 건드렸다.
상혁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던지며 창밖을 응시했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단번에 직감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모니터 화면으로 느릿하게 내렸다.
씨익, 한쪽 입꼬리가 위험하게 말려 올라갔다.
상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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